30대 직장인 A씨는 집에 있을 때면 하루종일 뉴스를 틀어둔다. 코로나19 현황을 바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나날이 불안감이 커지던 어느 날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n번방 사건) 보도를 접한 뒤엔 우울감이 더해졌다. 상세한 범행 내용이나 모자이크된 성착취물 이미지를 봤을 때의 역겨움이 가시지 않아 관련 기사 읽기를 포기했다. A씨 동료는 찝찝함을 안고 잠들었다 악몽을 꿨다고 했다. A씨는 “이유 모를 무력감이 계속된다. 나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세계적 감염병 대유행과 충격적인 성착취 사건 소식이 겹치면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눈에 띄고 있다. 미디어를 통한 정보의존도가 높아지면서도 관련 정보에 ‘짓눌리는’ 이중적 상황에 놓인 탓이다. 직접적인 사건 피해자가 아닌 이들이 사회적 재난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대리외상(자신에게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불안을 겪는 증세)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런 때일수록 언론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집중적으로 제공하고 사회적 치유를 도와야 한다는 전문가 지적이 나온다. 

시민들의 정보의존 현상은 코로나19와 함께 찾아왔다.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연구팀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진행한 ‘코로나19 관련 국민위기 인식 설문’ 조사 결과는 지속적인 ‘정보집착’ 양상을 보여준다. “최근 일주일 동안 코로나19 정보·뉴스를 얼마나 자주 ‘직접’ 찾아봤는지” 묻는 문항에 ‘찾아봤다’고 답한 응답자는 1차(1월31일~2월4일) 86%, 2차(2월25일~28일) 95.7%, 3차(3월25일~28일) 92%로 나타났다. 2차에 비해 3차 조사 때 소폭 줄어들긴 했으나 여전히 ‘자주’ 뉴스를 찾아보는 경우가 압도적이다.

▲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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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보도, 현황 중계보다 ‘위기돌파할 힘’ 필요

그럼에도 ‘정보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직접 찾은 정보에 대한 신뢰도는 65.7%(2차)에서 61.9%(3차)로 줄었다. 앞선 2차조사에선 “뉴스량은 지나치게 많지만 비슷비슷해서 내용이 빈약하다”는 항목에 응답자 84%가 동의하기도 했다. 당시 연구에 참여한 주영기 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는 “신규 확진자 소식이나 사회경제적 여파 보도는 모두 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피해를 알리는 ‘네거티브 진단 기사’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며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의 위기 대응과 관련한 ‘건설적 처방’ 기사 아이템을 균형감 있게 전달하는 것도 위기 대응에서 언론이 고려해야 할 측면”이라고 설명했다.

유명순 교수는 미디어오늘에 “인포데믹(잘못된 정보가 전염병처럼 퍼지는 현상)은 보도의 양에서도 비롯된다. 필요한 정보만 골라보라고 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정보의 과장뿐 아니라, 지나친 양의 정보가 주는 압박감에 눌리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며 “메르스와 코로나19의 초기 한 달간 보도량(지상파3사+조·중·동·한겨레·경향+종편 2개사+연합뉴스 기준)을 보면 코로나 보도가 50% 이상 활발하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이) 위기돌파에 힘이 되는 기획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뒤만 쫓을 수는 없지않느냐”고 꼬집었다.

현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 가운데 공포가 줄고 슬픔이 늘어나는 추이도 주목할 지점이다. 불안, 충격, 혐오 등 응답률이 조사 때마다 변화를 보인 데 반해 슬픔은 1.6%에서 3.7%, 7.2%로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같은 기간 유일하게 감소세가 이어진 공포는 21.6%, 18.1%, 12.6%로 점차 낮아졌다. 연구진은 “감염병 사태의 장기화에 따른 감정변화의 한 단면”이라 분석했다. 응답 비중이 가장 높은 불안은 60.2%에서 48.8%로 하락했다 최근 조사에서 52.8%로 다시 소폭 상승했다.

이런 때일수록 희망적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예컨대 코로나19 확진자나 격리자들이 수칙을 어겼다는 사례만 경쟁적으로 전하기보다 모범이 될만한 이야기를 조명하자는 것이다.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사업부 소속 이정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미디어오늘에 “수칙을 지킨 이들을 응원하고 그들이 돌아올 때 잘 맞아주는 분위기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한 뒤 “보건복지부 국가트라우마센터나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에서 제공하는 감염병 스트레스 관련 정보·지침을 활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언론보도 관련 한국여성민우회 카드뉴스 '가해자의 개인사가 아닌 사건에 집중하라' 일부.
▲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언론보도 관련 한국여성민우회 카드뉴스 '가해자의 개인사가 아닌 사건에 집중하라' 일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피해사례·가해자서사 지양해야

스트레스 취약성이 높아진 상태에선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n번방 사건) 같은 성폭력 사건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 역시 클 수밖에 없다.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원래는 심리적 복원력(resilience)이라는 게 있는데, 지금처럼 코로나19 등으로 불안이 지속되면 평소에 충격을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만한 문제로도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정현 전문의도 “코로나19와 n번방 사건 뉴스는 반복적으로 불안감을 부를 수 있다. 불면증이 생기고, 수면의 질이 떨어져 악몽을 꾸거나, 가슴 두근거림, 각성, 집중력 저하 등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성착취물 이용자가 약 26만명으로 추정되고 피해자 또한 불특정 다수라는 특성상 관련 뉴스를 본 청소년·여성 등이 간접경험을 통한 심리적 외상을 입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언론이 성폭력 피해사례를 구체적으로 보도하는 건 사건의 본질적 문제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데 비해 부작용이 클 수 있다. 필요한 대응책보다 과도한 공포나 스트레스 반응에 (뉴스 수용자들이) 압도될 수 있다”며 “n번방 사건은 다 같이 분노해야 하는 뉴스이지만 흥밋거리 위주의 기사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고 당부했다.

이는 피해자 중심주의적인 보도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26일 텔레그램 성착취 보도와 관련해 언론이 피해 내용 묘사 등으로 사건을 상업적으로 이용해선 안 되며, 사진·영상·삽화·그래픽 등으로 2차 피해를 불러선 안 된다고 밝힌 바 있다. 민우회는 또한 △가해자의 일방적 스피커로 기능하지 말 것 △가해자를 쉽게 인면수심 등으로 묘사해 성폭력을 일상과 분리된 범죄로 부각하지 말 것 △사건과 무관한 사람 인터뷰를 인용하지 말 것 △수사기관 정보의 공개 적절성 여부를 판단해 자기 책임 하에 보도할 것 등 원칙을 지키라고 언론에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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