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기자 출신 정필모 전 KBS 부사장이 더불어민주당 위성정당 비례대표 후보로 나선 뒤 후폭풍이 거세다.

민주당의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의 언론계 후보 추천 요청에 정 전 부사장을 추천했던 고찬수 한국PD연합회장이 27일 “정필모 전 부사장의 비례대표 출마가 공영방송 KBS의 독립성과 신뢰성에 상처를 입혔다는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추천 결정을 철회하기로 했다”고 밝히는 등 언론계가 혼란에 빠졌다.

이에 앞서 KBS PD협회 운영위원회에서도 정필모 전 부사장 비례대표 추천 건을 논의했다. 결과는 추천 철회였다. 정 전 부사장 추천은 KBS 기자협회 등과 협의나 통보 없이 이뤄진 사안으로 ‘깜깜이 추천’이라는 지적도 뒤따랐다. 개정 선거법 취지를 가로막는 비례 위성정당에 언론계 현업단체들이 편승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후보인 정필모 전 KBS 부사장. 사진=미디어오늘
▲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후보인 정필모 전 KBS 부사장. 사진=미디어오늘

정 전 부사장 추천을 밀어붙인 인사는 김동훈 한국기자협회장이다. 그는 ‘정필모 추천’ 입장을 고수한다. 더불어시민당은 현업 3단체(한국기자협회·한국PD연합회·전국언론노조)에 언론계 몫 비례대표 후보 추천을 제안했다.

현업단체 추천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관행에 가깝다. 이들 언론단체들이 ‘언론 개혁’을 담보할 후보를 정당에 요구하거나 반대로 정당이 적절한 인사 추천을 단체에 요청하는 관행은 공개적 또는 비공개적으로 이뤄져 왔다. 국회의원뿐 아니라 KBS·MBC 등 공영방송 이사 선임 때도 유사한 일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돼 왔다. 

4·15 총선에선 더불어시민당 제안 전까지 이 같은 후보 추천에 가시적 성과가 없었다. 더불어시민당 자체가 급조된 플랫폼 정당인 데다가 추천 요청도 비례대표 후보 마감 직전에 제안된 것이라 이후 과정은 불을 보듯, 급하게 굴러갔다. 현업 3단체가 생각했던 1순위 후보는 현직 언론인이었기 때문에 선거 전 30일까지 사퇴해야 한다는 규정에 저촉됐다. 2순위는 본인이 고사했다.

더불어시민당은 여성 언론계 인사 추천을 요청했고, 언론단체들도 여성 인사를 접촉했지만 당사자가 고사했다. 5명 정도까지 접촉했지만 성사가 안 됐다. 22일(일요일)까지 후보를 추천해야 하는 상황에서 직전날 언론노조가 이탈했다. 언론노조 내에서 위성정당 참여 반대 목소리가 나온 것. 결국 오정훈 언론노조위원장은 불참 의사를 밝혔다.

추천 마감 시한인 22일 김동훈 회장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정 전 부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비례대표 후보 출마 의향을 물었다. 지난달 19일 퇴임한 정 전 부사장은 KBS를 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피력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수락하고 추천이 이뤄졌다.

비난은 매우 거셌다. KBS 기자협회는 지난 24일 성명에서 “정치권력을 비판하던 감시견이 34일 만에 정당의 애완견으로 바뀐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나 정치 관련 취재 및 제작 담당자는 해당 직무가 끝난 후 6개월 내에 정치 활동을 하지 않도록 규정한 KBS 윤리강령 취지를 짓밟은 처사라는 주장이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도 “언론 현업단체들의 추천 인사로 후보자가 됐다고는 하지만 스스로 추천을 고사할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 전 부사장은 추천을 고사하지도 않았다”고 정치권행을 비판했다. 유력 언론인 출신의 정치권 입성은 해당 언론사 보도에 정파적 해석을 낳게 하고 언론 신뢰도와 공정성을 추락시킨다. 2014년 KBS 메인뉴스 앵커 출신 민경욱 기자가 박근혜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됐을 때도 이들 단체는 강하게 비판했다.

일각에 정 전 부사장을 옹호하거나 KBS 기자협회 입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경향신문 편집국장 출신 강기석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은 26일 페이스북에 “KBS 신뢰성이 허물어진 것은 몇 사람이 정관계에 진출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관계에 진출하지도 않은 내부 구성원들이 정관계와 유착해 편파 보도를 일삼기 때문인가”라며 “나는 (KBS 기자협회 등) 이들 성명이 ‘권력과 거리를 두려는 자부심’보다는 정필모씨를 희생양 삼아 국민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들의 빈약한 보도 행위에 알리바이를 꾸미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동훈 기자협회장은 27일 통화에서 “솔직히 말해 후폭풍이 이렇게 거셀 줄 몰랐다. 언론인의 정치권행을 비판할 수 있지만 이 정도까지 비난하는 것은 과하다”며 “공직선거법은 비례 선거 출마 언론인은 선거 30일 전에 사퇴하면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30일이 지난 사람은 정치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동아일보 조수진 기자는 공천 확정 직전 회사에 사표를 내고 미래한국당 1번(현재는 5번)을 받았다. 이와 비교해도 정필모 전 부사장에 대한 비판은 가혹하다”며 “이와 같은 추천 절차는 과거 총선 때도 있었다. 이수진 판사의 경우 판사를 그만두자마자 후보로 뛰고 있는데 기자 출신이 정치하는 것에 유독 인색한 면이 있다. 민경욱처럼 아침에 회의 참석하고 오후에 청와대 간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 김동훈 한국기자협회장. 사진=김동훈 페이스북.
▲ 김동훈 한국기자협회장. 사진=김동훈 페이스북.

김 회장은 ‘KBS 기자협회에 통보하지 않았던 이유’ 등에 “우리도 후보 추천을 포기하려고 했던 상황이었다. 문의하고 협의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며 “정필모 전 부사장으로 결정했을 때는 후보 등록하기 바빴다. KBS 기자협회와 상의했으면 좋았겠지만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마찬가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임기를 시작하면서 소수 반대를 무릅쓰더라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밀어붙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며 “이번 추천의 시작은 언론현업 3단체가 진행했는데 이들 단체장들이 엉터리 인사들은 아니지 않느냐. 모두 개혁적인 분들”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위성정당 참여에 대한 비판을 두고 “나도 찜찜했던 게 사실”이라면서도 “명분보다 실리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비례대표 당선권에 개혁적 인물을 추천해 언론개혁을 앞당길 수 있다는 실익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 조국 이슈 때 진보 진영 내 여러 이견이 제기됐다. 생각들이 많이 달랐다”며 “다양한 생각 자체는 존중하지만 ‘정당의 애완견’(KBS기자협회)과 같은 표현과 비난은 지나치다. 내 전화 전까지 정 전 부사장은 정치권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감정적으로 대립하기보다 차분히 토론회 등을 통해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전 부사장의 정치권행으로 언론계에 여러 목소리가 나온 가운데 현업단체들과 정당이 인사 추천을 주고 받는 관행도 점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KBS의 한 기자는 “현업단체들이 특정 정당에 대놓고 후보 추천서를 써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행위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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