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내가 혹시 확진자가 되면 아프거나 죽을 수 있다는 공포보다 더 큰 것이 있다. 14일 동안 일도 못하고 사람도 못 만나고, 무엇보다 바이러스 숙주로 낙인찍혀 비난받을 거라는 두려움이다.

실제 중국인, 대구경북 사람, 신천지 교인으로 이어지면서 바이러스 감염 피해자를 바이러스 확산 가해자로 매도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100년 전 미국에서 가정부였던 메리도 먹고살기 위해 여러 집에서 계속 일을 하면서 균을 옮겼고 ‘장티푸스 메리’라고 낙인찍혀 괴물로 비난받았다. 결국 국가 권력이 강제 영구 격리한 뒤 쓸쓸히 죽었다.

미국에서 생필품뿐 아니라 자기 방어를 위해 총기와 실탄 사재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보도를 보면 씁쓸하면서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팬데믹 속에 언제든 나도 사람들의 집단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가 부른 참사다.

하지만 집단 감염 속에 누가 ‘슈퍼전파자’ 구실을 했는지 ‘색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왜 요양병원, 장애인시설, 콜센터 같은 곳에서, 마치 공장식 축산에서 밀집사육 당하는 동물처럼,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힘겹게 생활하고 노동해야 했는지, 거기서 과연 인간이 우선이었는지, 아니면 이윤과 효율성이 우선이었는지 물어야 한다.

▲ 지난 2월20일 오후 대구시 남구 대명동 신천지 대구교회 인근에서 남구청 보건소 관계자들이 방역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2월20일 오후 대구시 남구 대명동 신천지 대구교회 인근에서 남구청 보건소 관계자들이 방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 사태 초기 취약 계층보다 주가폭락 속에서 은행과 투자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수조 달러를 주입하던 트럼프,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할 준비를 해야 한다’던 보리스 존슨의 대응을 보면 이들이 멜서스 후예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건강하지 않고 나이 들어서 일도 못하고 폐만 끼치는 사람은 죽게 내버려두거나 빨리 죽도록 하는 게 당사자나 주변 사람이나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엿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주의자인 조나선 닐(Jonathan Neale)은 1980년대 에이즈 공포가 미국 사회를 강타할 때, 성소수자들이 만들어낸 연대 의식와 공동체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당시 동성애자들은 아픈 친구들을 돌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안전한 섹스 캠페인을 벌이고, 정보를 공유하고 연락을 유지하며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정부가 시급하게 치료 약물을 연구하고 개발하고 저가에 공급하도록 요구하며 집단적으로 행동했다. 에이즈 사망자가 특히 많았던 남아공에서는 이런 운동으로 무료약 공급을 얻어냈다.

레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거대한 사회적 재난 속에서 오히려 이처럼 “상호 부조와 이타주의의 천국”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구조하고 서로를 보살피는 사회, 먹을 것을 나눠주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함께 보내는 사회, 사람들 사이 오랜 벽이 무너지고 아무리 가혹한 운명이라도 함께 공유함으로써 한결 가벼워지는 사회”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비규환 속에서 기적을, 슬픔 속에서 기쁨을,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주는” 이 현상을 “재난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을 부와 권력을 가진 사회 상층부에서 나타나는 공포와 불신, 혐오 조장과 악선동이라는 “엘리트 패닉”과 대비시킨다. 지금 한국 사회 일부 언론들과 정치 세력들이 보여주는 모습이야말로 바로 “엘리트 패닉”이라 할 수 있다. 레베카 솔닛은 더 나아가 재난과 혁명의 연결성과 유사성을 지적한다. “혁명이 재난이라면, 그 이유는 재난 역시 일종의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재난과 혁명, 이 두 현상은 연대와 불확실성, 가능성, 평소에 가동되는 체제들의 전복 같은 측면들을 공유한다. 다시 말해 규칙들이 깨지고 많은 문이 열린다.”

지금 코로나19 속 한국사회에서도 우한에서 귀국한 교민들의, 대구경북 시민들의 모습에서, 취약 계층 고통을 나누고 도우려던 여러 모습들에서 상호부조와 이타주의 가능성들이 나타났다. 가끔씩 전해지는 그런 소식과 장면들은 우리에게 감동과 용기를 준다.

이런 가능성을 확장해 언제나 병을 달고 다니는 가난한 사람들, 자가격리하면 아무도 돌봐줄 수 없어 잊힐 사람들, ‘거리두기’가 삶을 위협하는 처지의 사람들에게 사회적 지원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한다. 이윤과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적 삶과 연대성이 우선되는 사회로 급진적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방역의 국제적 모범’이라는 한국사회가 그것을 넘어서서 운동과 대안 건설의 모범이 되면 좋겠다. 감염병과 자본주의의 상호연관성과 커지는 위험에 대한 선구적 분석을 제시했던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도 최근 발표한 글에서 이런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이제 진정한 국제 공중보건 인프라가 없는 한 생물학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게 드러났다. 대중 행동이 거대 제약회사와 영리의료의 힘을 꺾기 전에는 그런 인프라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운동은 국제적 차원에서 건설될 필요가 있다. 자국의 취약 계층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주요 강대국들의 권력자들이 코로나가 제3세계 슬럼가와 난민촌에서 확산될 때 신경쓸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영국의 식민지 수탈에 시달리던 인도가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 최대 희생자였고 거기서 전 세계 사망률의 60%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가 국경을 존중하고 여권을 검사하고 인종이나 성별이나 종교를 가리지 않듯 우리에게도 모든 벽을 넘어서는 운동이 필요하다.

▲ 이탈리아에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유명 관광지가 텅 비었다. 사진은 로마에 있는 ‘스페인 계단’ 앞. ⓒ 연합뉴스
▲ 이탈리아에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유명 관광지가 텅 비었다. 사진은 로마에 있는 ‘스페인 계단’ 앞. ⓒ 연합뉴스

그리고 상황의 엄중함과 아래로부터 압력 속에서 세계적으로 전례없는 정책들이 도입되기 시작한 상황은 운동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주요국가들에 도입되기 시작한 정책은 일상적 시기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들이다.

① 미국: 모든 국민에게 1인당 1000달러의 긴급생계지원금을 지급하겠다.

② 스페인: 모든 민간 의료기관을 일시적으로 국가가 접수해서 통합 운영하겠다.

③ 이탈리아: 당분간 노동자에 대한 어떠한 해고도 금지한다.

지금은 비상 상황이고, 그동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시도해볼 수 있는 급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민간의료 기관들을 공공화하고, 의약품을 탈상품화하고, 임대료를 통제하고, 주요 생필품에 대한 가격 통제와 배급을 도입하고, 돌봄과 보건의료와 사회복지를 위한 대규모 공공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시장에 맡기지 말고 국제적으로 공동으로 백신을 연구 개발하고, 공공의료와 사회기반 시설이 취약한 남반구에 대한 국제 원조를 추진하고….

그동안의 잘못된 우선순위들을 뒤집으면 모든 게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지금 영국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급성폐렴 증상으로 노약자들이 사망하는 것을 막아낼 산소호흡기가 절대 부족하다. 보리스 존슨은 민간기업들에 빨리 만들어달라고 읍소 중이다. 그런데 산소호흡기는 F-16 같은 전폭기를 제조하는데 쓰이는 재료, 기술들과 겹친다.

사람을 죽이는 전폭기는 그토록 많이 만들어두던 체제가 왜 사람을 살리는 기구는 부족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에도 출판된 ‘좌파 세계사’ 저자이고 브렉시트에 맞선 영국의 좌파 역사학자 닐 포크너(Neil Faulkner) 주장에 강하게 동의한다.

“팬데믹은 40년 간의 신자유주의와 10년 간의 긴축에 의해 야기된 사회적 긴장감의 거대한 격화와 세계적 경제 붕괴를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 코로나 위기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깊은 병리학을 관찰할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한다. 우리는 전례 없는 사회적 원자화를 낳은 신자유주의 디스토피아에 살아왔다. 사회적 연대 네트워크는 강화되는 기업 권력에 의해 침식돼 왔다. 대안은 세계의 근본적 변혁, 즉 민간기업 인수, 민족국가 해체, 그리고 평등, 공공복지,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경제사회질서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기 위한 대중 권력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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