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시위는 빨갱이들이나 하는 거라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꿨다. 어림없어 보이던 대통령을 끌어내렸으며 정권도 바꿔놓았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이고 평생 자랑스러워할 경험이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차고 희망찼다. 대통령도 바꿨는데 못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서울시 따릉이 노조위원장 이충효씨도 그랬다. 그래도 세상은 기대처럼 쉽게, 희망한 대로 바뀌지 않았다.

이충효 위원장과 집행부 위원 김동욱씨는 입사 동기로 2017년 6월 일을 시작했다. 하던 일은 전혀 달랐다. 이충효씨는 지방 공무원이었다. 김동욱씨는 대기업에서 오래 일했다. 두 사람은 마흔이 넘어 서울시설공단에서 만났다. 공단을 선택한 이유는 비슷했다. ‘공단 간판’은 내세우기 좋아보였고 ‘정년 보장’ 네 글자는 대기업에선 볼 수 없는 것인데다 공공기관에서 하는 일이니 자부심도 클 터였다. 뭐가 됐든 ‘신의 직장’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싶어 기대감이 앞섰다. 

서울시설공단에서 ‘공무직’을 뽑는다는 채용공고가 떴을 때 두 사람 다 공무직이 뭔지 정확히 몰랐지만, 공무수행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공단에서 공무수행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겠거니 했다. 국가직무능력시험에 면접을 보고 최종합격하기까지, 또 합격하고 직무 교육을 받을 때까지도 공무직이 무기 계약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본사 교육을 받는 동안 강사들에게 질리도록 들은 말은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 ‘공직자니까 처신 잘하라’는 얘기였다. 

그들 업무는 자전거 분배다. 대여소에 자전거를 채워놓는 일을 한다. 편할 줄로만 알았던 일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두 사람이 배정받은 영남권 관리소는 동작구, 관악구, 영등포구와 여의도의 171개 대여소를 관리한다. 앱으로 자전거 대여소 상황을 확인하고 자전거가 많은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싣고 이동해 자전거가 없는 대여소에 채워 놓는다. 분배라고 부르는 이 배송 업무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일을 하면 할수록 더 많아졌다. 일은 끝이 없었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었다. 

따릉이를 이용하는 사람은 영등포만 ‘하루 평균 이용이 4000건’이 넘고 성수기 때는 두 배로 늘어난다. 성수기에는 서울시 전체 따릉이 이용자가 하루 평균 수만 명이 넘는다. 성수기는 3월부터 11월까지, 대여소에 가면 이용자들이 줄을 서서 자전거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다.

하루 평균 4000건이 넘는 이용자, 관악구에서 여의도까지 3개 구를 걸쳐 200개 가까운 대여소를 관리하는 영남권 센터에서 일하는 직원은 11명이 전부, 성수기 때만 기간제를 특별 채용해 16명이 교대로 일한다. 가까운 구로, 금천구를 비롯해 센터 대부분이 6명인 걸 감안하면 영남권은 그나마 많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출퇴근 시간에 이용자가 가장 많기 때문에 센터 근무는 그 시간에 맞춰 돌아간다. 오전 근무는 7시에 출근하고 오후 근무자는 10시에 퇴근한다. 성수기에는 ‘야간 패트롤’이 추가돼 오후 4시에 출근해 다음날 오전 6시까지 14시간 일한다. 야간에 꼭 해야 하는지 공단에 물으면 출근 시간 전에 자전거를 채워놔야한다는 답만 돌아왔다. 인원이라도 충원해달라고 요구해 보지만 서울시에서 정한 정원 이상 채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매번 거절당했다. 

▲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 ⓒ 연합뉴스
▲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 ⓒ 연합뉴스

일은 끝이 없는데 인원은 늘 부족하다. 그런데다 모든 일은 혼자 해야 한다. 야간 14시간 근무도 예외는 아니다. 자전거가 실린 차를 주로 도로 갓길에 세워두고 자전거를 하나씩 내려 대여소에 세워두는데, 차들이 달리는 도로 위에서 작업하는 건 목숨 걸고 일하는 것이다.

“위험해요. 그래서 야간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밤에 차 달려오는 거 보면 너무 무서워서 바닥 보고 일했어요. 새벽에는 차들이 엄청 쌩쌩 달리거든요. 예전에 과속으로 달리던 음주운전자 차량에 사고 난 적도 있어요. 대책이라고 해봐야 차 뒤에 전광등 하나 달아놓은 게 다예요”

새벽에 ‘보호 장비’ 하나 없이 혼자, 졸음을 참아가며 일하지만 공무직 직원들에게 주말 수당은 물론 운전 수당도 없다. 교통사고에 대비한 차량 운전자 보험만 하나 있을 뿐 사고가 생기면 모두 개인 책임이다. 자전거를 옮기다 실수로 보행자와 부딪혀 운전자가 보상했다는 얘기에 직원들은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꾹꾹 참았다. “곧 좋아지겠지”, “일반직 전환되면 나아지겠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별은 꼬리표처럼

이충효씨는 ‘형편없는 처우’인데도 자신에게 ‘공직자, 공직자’ 말하는 게 어이없었다. 대체 공무직이 뭔지, 처우가 왜 이런지 알아봐야겠다 싶어 공무직 관리규정을 찾아봤다. 그때 처음 무기 계약직에서 공무직으로 명칭만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계약직이라는 말만 쓰지 않았을 뿐 형편없는 처우는 규정에 근거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기가 차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그래도 입사 전 경력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의 공무원 경력은 인정받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다른 직렬은 입사 전 경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는 반면, 공무직은 인사규정에 따른다고 돼 있었기 때문이다. 공단에 경력 증명을 보냈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답이 없다. 그는 규정에 따라 경력 인정을 받고 공무직 처우를 개선하려면 노조를 만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수습 3개월이 끝나자마자 입사 동기들과 노조를 설립한 이유였다.  

형편없는 처우에도 참고 일하던 직원들이 폭발한 건 차별 때문이었다. 차별이 여지없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건 임금이었다. 첫 달 월급 147만원. 최저임금도 안 되는 액수였고 불법이었다. ‘원래 이렇다’던 공단은 노조에서 문제 삼자 그제야 소급 적용하겠다며 불법은 아니라고 발뺌했다. 위원장은 생활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실도 함께 지적했다. 공단은 대표노조와 통상임금 소송 중이라는 이유로 지급을 거절했고, 대표노조마저 ‘최저임금은 안 주면 불법’이지만 생활임금은 포기하라고 못 박았다. 위원장 생각은 달랐다. ‘조례에 그렇게 나와 있는데’ 받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싶었고, ‘정치권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당마다 전화를 걸어 상담을 요청했지만 관심을 갖는 곳은 없었다. 여당도 제1야당도 그런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소수 정당 힘을 빌려보자는 생각으로 정의당에 연락했고, 처음 상담이라는 걸 해볼 수 있었다. 곧바로 정의당 서울시의원을 만났고 생활임금을 받기까지 막힘이 없었다. 

“서울시나 청와대, 방송 다 관심 없었고 오히려 따릉이 현안으로 방송에 나가서 자기 인지도 높이려는 정치인은 있었죠. 유일하게 비상구에서 권수정 의원을 연결해줬어요. 의원이 생활임금 얘기 듣자마자 시정 질의해서 바로잡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일사천리로 해결되서 너무 놀랐죠. 이런 데가 다 있나. 시정 질의 하고 나니까 서울시에서 바로 지급한다고 하더라고요.”

생활임금으로 월급이 좀 오르고 공무직이 일반직으로 전환되면서 상황은 좀 나아지는 듯 했다. 월급 2~30만원 오른 것에 만족하는 조합원들도 있었지만 위원장은 “받아야 할 임금을 생각하면 차별받는다는 생각에 분통이 터진다.” 

다른 직렬엔 상여수당을 최저임금에 산입하지 않는데 유독 공무직에만 최저임금에 산입시킨다. 생활임금을 맞추려는 꼼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공무직만 입사 전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운전수당도, 승진도 없는 건 차별이라고 밖에는 달리 이해할 길이 없었다.

공단은 ‘차별이 아니라 차이’라고 하지만, 따릉이 직원들의 배송 업무는 일반직 운전직과 거의 차이가 없다. 대형면허자격증과 3년 무사고 경력이라는 채용 조건도 비슷하다. ‘나중에 관리감독이 다른 데로 바뀔지도 모르기 때문에 임시로 공무직을 뽑았다’는 공단 관리자 말대로라면 이제라도 자전거 관리직을 별도 직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노조 입장이다. 그러나 위원장은 공무직이 ‘평생 출신성분’으로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며 이런 상황이 어이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여기 온 거 많이 후회해요. 임금차별이 가장 힘들어요. 일반직으로 전환할 때 일반직 운전직 8급이었던 분들은 7급이 됐어요. 자전거 배송도 똑같이 운전을 하니까 7급으로 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8급이에요. 출신 성분이 무기계약직이니까. 같이 일하던 조합원이 최근에 일반직 운전직으로 이직했거든요. 호봉 인정해줘서 똑같이 운전하는데 월급 100만원 더 받아요. 그냥 이름만 바뀐 거지 차별은 여전해요.” 

2017년 147만원이던 월급은 생활임금을 받아 2019년 180만원 정도가 됐다. 공무직 규정상 겸직도 불가능하다. ‘솔직히 아르바이트 해도 이보다 더 받겠다’ 싶은 고강도 저임금에 직원들은 빚을 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가정에 무책임한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그런데다 3년 간 버텨온 직원과 올해 입사한 신입과 월급이 똑같다. 공단에 들어와 일한 3년도 경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운이 빠지고 허탈했다. 김동욱씨는 “진짜 계급이 있고 신분 차이가 있는 것 같다”며 화를 감추지 못했다. 

“시에서 따릉이 사업을 성공적 사업이라고 홍보하는데, 실제 일하는 노동자 처우는 안 좋잖아요. 정말 화나는 게 따릉이 정책 만족도 1위했다고 일반직이랑 시 관리자들은 승진파티 했다더라고요. 저희는 승진은 못 하고 승진시켜주는 사람들인 거예요.”

노조 일찍 만들 걸 후회해 

형편없는 대우와 달라질 것 없는 미래에 얼마 안 가 일을 그만두는 직원이 많다. 그만두지 못한 직원들은 일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이직만 생각했다. 이충효 위원장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문제는 해결이 안 되는데 새로운 갈등은 계속 생겼다. 노조 활동 역시 끝이 없고 열심히 하면 할수록 할 일이 늘었다.

조합원을 모으는 것도 어렵지만, 어렵게 모여 노조를 만들었다고 끝이 아니다. 공단 관리자들이 되지도 않을 승진을 빌미로 노조 탈퇴를 권유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장이 꼬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노조를 시작한 뒤로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담감에 잠을 못 잔 날이 많다. 최근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 병원 치료를 받을 정도로 힘든데 왜 그만두지 않느냐는 물음에 위원장은 촛불 이야기를 꺼냈다. 

강경대 열사와 입학 동기인 그는 시위 한 번 안 해 봤고 ‘저 빨갱이들’이라고 욕하던 자신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달라진 건 마흔이 훌쩍 넘어 촛불을 만나고부터였다. 사람들이 ‘적폐’를 없애자고 모인 것도 놀라웠고 대통령을 탄핵시킬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놀랍고 상상 못한 경험은 그의 삶도 통째로 바꿔 버렸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불의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고, 남 일 같던 일들이 결국은 내 일이었으며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일들에 ‘대통령도 바꿨는데‘ 싶었다. 촛불을 꺼뜨리지 말자는 생각은 일상에서 불의를 바로잡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차별을 없애자고 동기들을 설득하고 노조를 만든 건 그런 다짐 때문이었다. 노조 활동에 힘들고 지칠 때면 그는 촛불을 떠올린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고 뜻대로 되는 것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진 않았다. 희망이 있는 한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 건 순전히 촛불 영향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빨갱이가 됐다며 웃어넘겼지만 “이게 되겠냐”며 조소하는 사람들을 보며 더 안타까움을 느끼는 건 어쩌면 과거 자신이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계약직이라는 게 생기고 차별을 받게 된 건 오래 전 불의와 적폐에 무관심했던 결과는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촛불을 겪고 노조위원장으로 3년 간 살아보니 혁명은 멀리 있지 않다고 그는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중이 아니라 그때, 무관심하지 않고 행동했다면 지금 어땠을까 자주 생각한다. 좀 더 일찍 행동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늘 있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적폐에 순응하지 말자는 당부로 바뀌었다. 그의 바람대로 ‘길을 뚫으면서 찾아가는’ 일상 혁명가들이 많아진다면 희망하는 세상은 조금 더 빨리 올 지도 모르겠다.

“지금 3년째 따릉이하고 있는데 가장 길게 직장생활 하는 거예요. 직장도 여럿 다녀보고 사업도 해보고 공무원도 해봤는데, 일을 오래하지 못하고 그만둔 게 부딪치는 일들이 많았거든요. 불합리한 일들이 너무 많았는데 그때마다 ‘에이, 그만둬야지’ 한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이 여기 공무직인 거죠. 제가 선택했던 것들의 결과인데 반성을 많이 했어요. 부당한 게 있으면 거기서 바꿔야지, 그만두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정의로운 방향을 쉽게 포기한 거니까. 예전에 회사 다닐 때 노조를 만들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사람들에게 싸울 일이 있으면 싸웠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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