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 11일 중장기 방송제도개선 추진반이 제출한 정책제안서를 접수했다. 지상파의 ‘교차보조 시스템’을 바탕으로 설계된 2000년 방송법 체제가 수명을 다한 가운데 총선 이후 본격적인 방송제도 새 판 짜기를 예고하는 장면이다. 

방통위는 지난해 4월 방송·통신·미디어·법률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추진반을 운영했다. ‘방송규제체계’ 개선을 담당한 1분과는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 이종원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방송미디어연구실장 등이 참여했다. ‘미래 방송 통신 제도 정비’를 담당한 2분과는 황용석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김정현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황준호 KISDI 연구위원 등이 참여해 총 17회 회의를 가졌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정책제안서에 따르면 모든 방송에 포괄적으로 부과된 공적 책임은 사라진다. 기존 면허체계(재허가 시스템) 개편을 전제로 공영방송과 공공서비스방송(PSB)을 분리해 허가체계별 명확한 책무를 부과한다. 공영방송은 영조물로서 법적 실체를 규정하고 지금보다 구체적인 공적책무를 부과한다. PSB는 법률로 공적책무를 정하고 방송사가 공공서비스와 지배구조를 갖추면 정부가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필요한 공적 재원을 지원하는 구조다. 

실시간 방송되는 고정형TV 중심의 방송 개념도 달라진다. 정책제안서는 방송 개념을 ‘서비스’ 중심으로 바꾸고, 방송·통신·인터넷 융합환경에 맞도록 ‘시청각미디어서비스’ 개념을 신설하고 있다. 앞서 EU는 2018년 11월 시청각미디어서비스지침(Audiovisual Media Services Directives) 개정안을 채택해 시청각미디어서비스를 텔레비전·VOD·동영상공유플랫폼으로 나눠 유튜브·페이스북에서 유통되는 시청각콘텐츠도 규제의 틀에 넣었다. 

제도개선 추진반은 크게 △동영상 여부 △편집권 유무에 따라 시청각미디어서비스/정보사회서비스, 콘텐츠/플랫폼/네트워크로 분류했다. 시청각미디어서비스는 실시간과 주문형(VOD)을 구분하고 실시간 콘텐츠는 방송채널(지상파·PP)과 실시간OTT채널로 구분했다. 실시간 플랫폼은 방송플랫폼(지상파·SO)과 실시간 및 주문형 OTT플랫폼으로 나눴다. 편집권이 없는 방송망과 통신망은 네트워크로 분류했다. 인터넷신문, 팟캐스트, 포털, 카카오톡 등은 정보사회서비스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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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미디어서비스 개념 도표. ⓒKISDI

1분과 멤버 이준웅 서울대 교수는 지난해 계간 ‘방송문화’ 가을호에서 “방송이 아닌 역무를 방송처럼 규제할 방법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방송을 대신 할 새로운 개념, 예컨대 ‘시청각매체’ 등과 같은 포괄적 개념을 도입해서 매체 규제에 대한 접근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제언한 바 있다. 2분과 멤버 황준호 KISDI 연구위원은 “OTT로 인한 규제 형평성 문제가 있다”며 “방송통신설비, 전송기술, 수신방식, 제작은 방송서비스를 규정하는 요소에서 제외할 것”이라 예고한 바 있다. 

제도개선 추진반은 ‘방송 공공성 강화 및 미디어 생태계 회복’ 과제로 △공·민영 방송체계 개편 △공영방송의 공공성 확보 △방송 재원의 위상 정립 및 다각화 △시청자 권익 강화 △지역성 구현 기반 확대 △보편적 서비스 구현 및 네트워크 운영 효율화를 제시했다. ‘방송·통신·인터넷 융합에 따른 미래지향적 규제체계 정비’ 과제로는 △방송·통신 규제체계 정비 △방송 개념의 재정립 △OTT 등 신규서비스 정책 마련 △미래형 방송 통신 융합서비스 활성화를 제시했다. 

2020 시청각미디어서비스 설계도, 목적은

방통위 관계자는 “OTT는 현행법상 부가통신사업자이지만 이용자들은 콘텐츠사업자로 인식한다. 하는 일에 맞는 법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시청자가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에는 비슷한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 핵심이 있다. 앞서 지난해 중장기 방송제도 개편방안 토론회에서 이종원 KISDI 방송미디어연구실장은 “지상파가 갖고 있던 독점사업권과 공적책무의 교차 보조는 작동 불능 상태”라며 “2000년 방송법을 다시 디자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튜브.
▲유튜브.

지상파는 지금껏 모든 시청자를 대변해야 했다. ‘포괄성’이라는 공적 가치 때문이다. 과거엔 독점적 플랫폼 사업자로 상당한 대가를 얻었기 때문에 여러 책임들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산업적 방식으로 어떤 수용자를 어느 정도로 포괄할 것인가에 대해 전략적으로 선택할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게 정책제안서의 방향이다. 규제기관은 포괄되지 않는 영역을 찾아내 대안을 마련하는 것을 PSB의 정책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유튜브로 대표되는 OTT가 모든 걸 바꿨다. 

개선안의 핵심은 지상파 교차 보조 시스템 폐지, 글로벌OTT에 대항하기 위한 국내사업자 규제 완화로 해석해볼 수 있다. 현 규제체계로는 지상파도 무너지고 글로벌OTT에도 대항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결정이다. 허욱 방통위원은 11일 이번 개선안을 두고 “공영과 민영을 명확히 나눠 민영방송에는 더 많은 자율성을 주고 공영방송에는 공적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고 물적 기반을 제공하는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공영도 민영도 아닌 중간그룹은 PSB로 묶이는 식이다. 

허욱 위원은 “MBC는 공영방송에 속할 수도 있고 PSB에 속할 수도 있다”고 했다. “예컨대 MBC가 남북관계나 통일 관련 프로젝트를 중심적으로 추진해 정부가 지원한다면 일종의 PSB에 대한 공적 재원 투입 방식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OTT에 대해서는 “규제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이라며 “기존 방송법 안에 OTT를 넣으면 규제 수위가 높아진다”고 했다. 그러나 “OTT를 최소 규제하면 규제 형평성의 문제가 온다”며 전반적인 규제 완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라 밝혔다. 

앞서 김여라 국회입법조사처 과학방송통신팀 입법조사관은 “텔레비전 방송부터 VOD, 온라인 동영상 제공사업자까지 각 사업자 간의, 그리고 국내 및 해외사업자 간의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도록 규제의 틀을 명확하고 공평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2019년 7월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이 된 뉴미디어 전문가 강정수 박사는 2018년 “방송의 공적 기능을 KBS에 집중하고 민영방송은 통신사·인터넷기업과 융합 가능한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분과 멤버 정준희 한양대 겸임교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결과로 지상파 매체력의 급속한 저하를 꼽았다. 그는 지난해 ‘방송문화’ 가을호에서 “침몰을 멈추고 나아가려면 지상파라는 배의 설계를 바꿔야 한다. 더불어 그 배가 의무적으로 실어날라야 할 짐의 종류도 재선별하고 전반적으로 그 무게 역시 상당량 줄여 줄 필요가 분명히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배의 용도변경을 위해 “단순히 침몰하고 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 배를 고쳐 쓸 필요가 공감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준희 겸임교수는 “과거의 사고방식은 우리를 치즈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면서 “지상파는 내부 제작 단위를 상당 부분 독자적 프로덕션의 연합 형태로 바꾸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 한다”고 제안했다. 이를 통해 프로덕션은 소속 방송사를 넘나들며 배급을 시도하고, 방송사는 자기 매체 특성과 타깃 수용자에 매칭되는 제작 전략을 수립해 프로덕션을 결합시키는 식이다. 인하우스 체계의 ‘파괴’다. 2020 시청각미디어서비스 설계도는 이외에도 수많은 ‘파괴’를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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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위원회. 

40년 된 수신료부터 ‘코바코’ 체제까지 뜯어 고칠까  

정책제안서에는 모바일·온라인 광고 약진과 방송 광고 감소, 수신료 정체에 따른 ‘방송재원 위상정립 및 다각화 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공영방송의 경영합리화를 전제로 수신료 현실화 및 사회적 기여도 등을 고려해 OTT 등 방송통신발전기금 부과 대상 확대 검토’가 명시되어 있다. 공적 재원의 구조가 바뀔 수 있는 지점이다. 이에 따라 1981년 이후 39년째 멈춰있는 수신료 2500원에 대한 현실화 논의가 구체화 될 수 있다. 

현 방송법상 TV를 소지한 자는 수신료를 납부한다. 통계청 화폐가치 계산에 따르면 1981년 3월 기준 2500원은 2020년 2월 기준 1만325원이다. 수신료는 1994년 10월부터 전기요금에 통합 징수되고 있으며, 현재 수신료의 3%인 71원이 EBS로, 97%인 2291원이 KBS로 가고 있다. 만약 수신료가 오르고 MBC가 공영방송으로 묶일 경우 KBS-MBC-EBS로 수신료 분배가 이뤄지거나 또는 수신료 일부를 일종의 PSB 기금으로 나눌 수도 있다. 관건은 수신료 현실화의 정당성을 공영방송사들이 확보하는 과정이다. 

수신료 현실화 논의로 KBS 2TV 광고가 축소 또는 폐지되거나, 또는 MBC가 PSB로 구획되는 과정에서 직접광고영업을 요구할 경우 1980년 시작된 코바코(KOBACO,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과거 한국방송광고공사)의 미디어렙(광고 판매 대행) 체제도 일대 변화를 맞을 수 있다. 정책제안서는 이미 ‘지상파·PP 간 비대칭 규제 해소를 위한 중간광고 등 광고 규제 개선, 미디어렙 배분제도 개선 검토’를 명시한 상태다. 강정수 박사는 2018년 “코바코의 소멸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KBS, MBC, EBS는 코바코에 무조건 광고영업을 위탁해야 한다. SBS와 종합편성채널의 경우 자사 미디어렙을 통해 사실상 직접광고영업을 하고 있다. MBC는 지속적으로 자사 미디어렙을 요구해왔다. 허욱 방통위원은 코바코 체제 해체나 MBC 직접광고영업 등이 이번 정책제안서 작성 과정에서 논의되었느냐는 질의에 “연구반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없다”고 답하면서도 “코바코 해체가 광고시장 전반에 도움이 될지 봐야 한다”고 밝혔다. 코바코가 소멸하더라도 지역·중소·종교방송사의 다양성을 보장해주던 결합판매 등 공적 영향력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쟁점이다. 

▲지난 11일 방통위에서 허욱 방통위원이 기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방통위
▲지난 11일 방통위에서 허욱 방통위원이 기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방통위

2000년 탄생한 방송발전기금도 향후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교차보조 시스템의 핵심으로, 일종의 지상파방송사업자 면허세 개념으로 탄생한 방발기금은 이제 지상파 독점구조가 무너지며 지상파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상파는 지난해 361억 원, 종편은 51억 원의 방발기금을 냈다. 2019년 방발기금 징수율은 KBS 2.62%, MBC 3.87%, SBS 3.96%(광고 매출액 대비)다. 출범 이후 5년간 방발기금 면제 혜택을 받은 종편의 2019년 징수율은 1.93%다. 

한국의 경우 지상파3사와 올레TV·Btv·U+TV 등 IPTV, 유튜브, 넷플릭스 등이 모두 콘텐츠로 수익을 내고 있지만 방발기금을 내는 곳은 이 중 지상파 3사뿐이다. 심지어 지상파 영향력을 뛰어넘은 CJ ENM도 방발기금을 내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면허세 개념을 없애고 콘텐츠사업자들의 콘텐츠진흥기금형태로 변화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프랑스가 일정한 매출 규모의 콘텐츠사업자를 대상으로 콘텐츠 진흥 목적의 방발기금을 걷고 있다. 고찬수 한국PD연합회장은 “통신3사, 네이버·구글, CJENM 모두 콘텐츠진흥기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 

이번 정책제안서는 완성본이 아니다. 본격적 논의는 이제부터다. 개선 추진반의 좌장격이었던 허욱 방통위원은 “법 제도가 아직도 2000년 통합방송법에 머물고 있다”며 “정책제안서는 지난 20년의 정책 공과를 점검하고, 교차 보조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방통위는 이번 정책제안서를 두고 △방송의 공공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 △사업자 중심이다 △공영방송과 공공서비스방송(PSB) 기준이 모호하다는 우려를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김동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겸임교수는 “방통위가 중요한 쟁점과 과제를 잘 짚었지만 방통위 혼자 추진하기 어려워 보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있는 통신·망 사업 등 ICT분야까지 포괄하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부처가 분리된 상태에서 추진이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구체적 실행 계획 마련을 위해 실무를 담당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추진력 확보 차원에서 대통령 직속 기구를 설치하거나 방통위 또는 TF에 권한을 대폭 넘겨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1999년 방송개혁위원회 공청회 모습. ⓒ연합뉴스
▲1999년 방송개혁위원회 공청회 모습. ⓒ연합뉴스

현 시점에서 20년 전 통합방송법 탄생 과정을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 1998년 12월 출범했던 방송개혁위원회(방개위)는 방송협회, 케이블TV협회, 유선방송협회, 위성방송추진협의회, 광고단체연합회, 언론노조, 언론개혁시민연대 등에서 위촉한 인사들이 실행위원으로 참여한 대통령 직속 기구로, 제도/발전/기술 등 세 개 분과로 논의를 진행했다. 논의 막판 정부·여당이 방송장악 의도를 갖고 있다며 언론노련(현 언론노조) 등이 탈퇴하며 미완의 결과를 남겼다. 

2000년 방송법 결과물은 방송위원회의 위상 강화였다. 지상파방송, 케이블TV, 중계유선방송(정보통신부)로 다원화되었던 소관 부처가 방송위원회로 일원화됐다. 방송위는 방송정책권을 비롯해 방송 운영·편성정책·방송 영상 진흥 정책·방송 기술 정책 등을 도맡게 됐다. 이번 개선안 역시 방송통신위원회의 위상 강화로 논의가 흐를 수 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방통위의 공식 입장도 아니고, 아이디어 차원에서 내놓은 정책제안서”라며 “코멘트할 게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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