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한국교육방송공사, 대표 김명중)가 수능교재를 만들면서 현직 교사가 직접 번역해 만든 사료번역물을 무단전재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역사교사 A씨는 자신이 만든 세계사 교재의 내용을 자신의 동의 없이 EBS 수능교재에 무단전재된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지난 2018년 12월 EBS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무단전재 부분을 새로 발견해 EBS와 교재 집필진 5명을 상대로 지난해 12월 추가로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1993년부터 세계사 수업시간에 사료를 활용한 학습을 시작했다. 당시 교과서에는 사료가 거의 실리지 않았고 암기 위주 입시 분위기에서 A씨는 학생들이 역사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주요 사료를 번역해 수업교재로 활용했다. 이후 7년간 번역해 활용하던 자료를 묶어 2000년 4월 책으로 냈다. 

A씨는 소장에서 “편집저작물인 원고(A)의 서적엔 300여개에 이르는 세계사 관련 사료번역물이 실렸는데 모두 원고가 오랜 기간 연구를 통해 축적한 학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고등학교 세계사 학습에 필요한 자료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해 원저작물을 직접 번역하거나 영어·일어 번역문을 학생들 수준에 맞게 번역한 ‘번역저작물’로 각각이 하나의 독립된 저작물”이라고 주장했다. 

저작권법 5조 1항은 “원저작물을 번역·각색·영상제작 등 방법으로 작성한 창작물(2차적저작물)은 독자적인 저작물로 보호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 A씨의 번역저작물(위)과 이를 출처없이 전재한 2011년 EBS 수능특강 교재(아래)
▲ A씨의 번역저작물(위)과 이를 출처없이 전재한 2011년 EBS 수능특강 교재(아래)

 

A씨가 발견한 무단전재 부분은 2008~2017년 교재 18권에서 735군데(중복부분 제외), 2011~2018년 동영상 강의 15개에서 449군데(중복부분 제외)였다. 

A씨는 EBS 측이 수능교재와 동영상강의에서 무단전재한 부분의 수, 판매부수, 저작권법 25조와 하위 규칙에 근거한 보상단가 등을 참고하면 저작물 이용 보상금이 총 2억4000여만원이라는 입장이다. 

EBS 측은 미디어오늘에 “각 검인정 교과서에 실린 사료 번역문을 교육부 세계사 자료 및 EBS 교재, 각 출판사 교재 등에 실은 사안으로 EBS는 교사 A씨가 사료 원문 등을 번역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며 “교과서에 실린 원문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현재 소송 중에 있다”고 답했다. 

EBS 측이 지난해 6월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한 서면을 보면 EBS가 ‘국가에 소속된 교육지원기관’이며 EBS 교재는 학교수업 보완·공교육 정상화 등 학교교육 지원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점, 집필진(현직교사들)이 EBS 소속된 이들이 아닌데 EBS는 집필진에게 완성된 교재를 인도받아 출판했을 뿐이라 고의·과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주장했다. 

또 저작권 침해가 있더라도 EBS가 고의로 출처를 누락한 게 아니라 EBS가 외부 집필진들에 대한 관리·감독상 과실로 인한 것이고 A씨가 2017년 3월 처음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는데 EBS가 곧바로 조사해 수능교재에서 A의 저작물을 교체해 침해행위를 중단했다며 위자료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작권법 25조 2항을 보면 국가나 지자체에 소속된 교육지원기관은 수업·지원 목적상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저작물 일부를 복제·배포 등을 할 수 있다. EBS는 자신들을 이 조항에 따른 교육지원기관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A씨는 문화체육관광부에 EBS가 저작권법 25조 2항에 따른 ‘국가 소속 교육지원기관’에 해당하는지 문의했다. 이에 문체부 저작권정책과는 지난해 9월 “국가나 지자체에 소속된, 즉 구성원 신분이 공무원으로 구성된 기관이 아니므로 EBS가 교육기관의 수업을 지원하기 위해 국가나 지자체에 소속된 교육지원기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 EBS 저작권 침해제보 사이트 갈무리
▲ EBS 저작권 침해제보 사이트 갈무리

 

A씨는 집필진이 작성한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 인쇄·발행·판매·전송한 EBS만의 책임도 있고 EBS와 수능교재 표지에 교재 저작권이 EBS에 귀속됐다고 기재한 점을 지적했다. EBS는 평소에 저작권 침해제보 게시판을 운영하는 등 외부사업자에 대해서는 적극 저작권 보호조치를 한 점 등도 지적했다. A씨는 EBS가 집필진에게 책임을 떠넘긴다고 판단해 두 번째 소송에선 집필진들도 피고에 포함했다. 

교육부·유명학원도 무단전재 

현직교사 A씨의 EBS와 저작권 다툼은 처음이 아니다. 교육부(당시 교육과학기술부)가 2011년 ‘사료로 보는 세계사’라는 책을 만들어 전국 중고등학교에 배포했는데 이 중 A씨 세계사 교재에 수록된 사료번역문 15개가 일부 변경돼 출처없이, 18개는 출처가 사실과 다르게 표기돼 있었다. 이후 교과서 집필자들이 교육부 해당 서적을 출처로 인용하며 A씨는 2차 침해까지 당했다. 

이에 A씨는 교육부에 1차 전화통화로, 2차 국민신문고 민원으로 정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지난 2016년 9월 저작권 침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교육부는 해당 저작물에 창작성이 없으므로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없으며 교육부가 책을 발간한 게 영리목적이 아니므로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번역저작물의 창작성을 인정해 A씨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17년 2월과 6월 교육부가 A씨에게 3800만원을 지급하는 내용의 화해권고를 결정했지만 교육부가 이에 불복했다. 결국 1심과 항소심을 거쳐 2018년 10월 서울고등법원은 교육부가 A씨에게 1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소송 중이던 2017년 2월 교육부는 장관 명의로 전국 시도교육청에 출처표시가 잘못된 부분을 정정하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유명 온라인교육업체 메가스터디 소속의 역사 강사 L씨도 교사 A씨 교재를 무단전재했다. 메가스터디 홈페이지에서 강사 L씨 게시판을 보면 L씨는 “(자신의 강의교재 4권에) 수록된 사료번역문 69개 사용에 대해 미처 저자 A의 사전 허락을 받지 못했다”며 “이후 사료 사용에 대한 저자의 최종 허가를 받아 공지한다”고 지난해 8월 밝혔다. L씨는 EBS 강사 출신이다. 

▲ 1989년 10월25일자 경향신문 15면 기사 "국교생이 문교부를 꺾었다"
▲ 1989년 10월25일자 경향신문 15면 기사 "국교생이 문교부를 꺾었다"

 

A씨는 교육계에 만연한 표절과 교육부·EBS 등 공적역할을 담당하는 곳의 무책임한 태도를 문제 삼으며 교육부가 초등학생의 글을 표절한 이른바 ‘찾아야 할 고향사건’을 언급했다. 1989년 경향신문 “국교생이 문교부를 꺾었다”란 보도를 보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980년 서울의 한 초등(국민)학교 6학년 학생 윤정아씨는 글짓기 대회에서 ‘내가 찾을 할아버지의 고향’이란 글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윤씨는 같은해 동생과 함께 동시집에 해당 글을 실어 작품집을 펴냈다. 이듬해 외국으로 이민을 떠난 윤씨가 1986년 귀국했다가 우연히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교과서에 무단전재된 사실을 알았다. 

문교부(현 교육부)는 1981년부터 교과서에 윤씨 동의없이 제목을 ‘찾아야 할 고향’으로 지은이를 ‘3학년 4반 황정아’로 고쳐 실었다. 문교부는 ‘교육정책상 목적으로 저작권 침해가 아니며 국교생(초등학생)에게 우월감, 영웅심을 갖게하지 않으려는 교육적 배려’라 주장했지만 대법원을 거쳐 파기환송심까지 간 다툼 끝에 서울고등법원은 ‘정부가 윤씨에게 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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