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출신 총선후보(예비후보 포함)들이 기자나 PD 때 어떤 기사와 프로그램을 만들었는지 살폈다. 몇몇 후보는 특종으로 정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또 몇몇 후보는 오래전 언론사를 퇴사하고 정치권으로 옮겼다. 미디어오늘은 잘 알려진 정치이력보다는 과거 그들이 직접 쓴 기사로 후보들을 평가했다. 아직 경선이 진행중이라 후보가 모두 확정된 상황은 아니다. <편집자주>

이낙연, 1987년 DJ 마크맨

이낙연 민주당 서울 종로구 후보는 1952년 전남 영광 출신으로 광주에서 고교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첫 직장은 한국투자신탁이었다. 1979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낙연 기자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땐 조용했다. 그해 8월28일 결혼했다.

이 기자는 1981년부터 짧은 연조에도 대형 기획기사를 자주 썼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분석했던 대형 기획 ‘오늘의 기류’에선 한일 외상 회담을 분석해 한일관계를 전망했고 북한의 대외정책 흐름도 분석했다. ‘잠깐… 5분 인터뷰’란 짧은 고정칼럼에선 당시 김동휘 외무차관, 민병기 주불대사, 최경록 주일대사, 정석모 민정당 정책위 의장 등을 인터뷰해 국내외 정치 흐름을 익혔다. 이 기사는 이 기자 개인의 정치 인맥 확대에도 도움을 줬다.

이 기자는 1981년 5월7일자 3면 ‘한-아세안 새 협력시대’라는 해설기사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아세안 5개국 순방은 5공화 외교가 지난 2월 한미정상회담에 이어 제2의 도약을 맞는 계기”라며 80년대초 전형적인 대통령 미담기사를 썼다.

문공부는 1986년 6월 전국을 달궜던 KBS 시청료 거부운동에 떠밀려 ‘KBS 개선안’을 내놨다. 이 기자는 문공부 발표에 ‘KBS 공정성 이뤄질까’라는 제목을 달아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개선안은 KBS 자문위원회 의견이 보도편성에 얼마간 구속력을 갖고 KBS를 일정하게 국회의 감시 아래 두자는 내용이었다. 이 기자는 개선안이 시청자 불만을 완전 해소하기엔 의문이라며 “KBS거부운동의 근본은 보도의 편파성, 불공정성에 있었다”며 “개선안의 성패 역시 앞으로의 KBS 보도제작에서 어느 정도 시청자의 불만을 해소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짚었다.

▲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는 이낙연 전 국무총리. ⓒ 연합뉴스
▲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는 이낙연 전 국무총리. ⓒ 연합뉴스

이낙연 기자는 1987년 12월 16년만에 다시 치러진 직선제 대선에선 김대중 평민당 후보를 마크했다. 이 기자는 대선 다음날인 1987년 12월18일자 2면에 낙선한 김대중 후보를 인터뷰해 “공무원과 국영기업체, 심지어는 개인기업까지 여당의 선거운동을 했고 여당이 선거자금을 독점하고 TV를 악용하고 야당 참관인을 매수하고 부재자투표에서 나한테 온 50만표를 해먹고…. 심지어 2등과 3등의 순위조작까지 하지 않았는가”라는 김 후보의 울분을 지면에 담았다.

1990년초 일본 특파원으로 나가 4년간 일본 사회당의 우경화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지켜봤다. 특파원 때 이 기자는 1990년 11월27일자 17면 ‘컴퓨터로 일본 정복 33세 교포3세’ 기사에서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을 인터뷰했다. 이 기자는 위안부 모집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 기사를 쓰는 등 전쟁 피해 해결에 주목했다.

이 기자는 논설위원이었던 1999년 1월18일자 6면에 ‘DJ가 듣기 싫어하는 말’이란 칼럼에서 김대중 정부 1년을 평가하면서 “개혁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정교한 전략과 전술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국제부장이 된 이 기자는 1999년 12월2일 ‘風과 文의 메시지’란 칼럼에서 북풍, 세풍, 총풍으로 혼란했던 한국 사회를 되짚었다. 기자가 만들어 여권 실력자에게 보낸 ‘언론문건’과 검찰총장 부인의 ‘옷 로비’에, 북풍까지 겹쳤던 1999년을 끝으로 이 기자는 2000년 2월 퇴사한 뒤 석달 만에 치러진 총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고향 영광군 국회의원이 됐다.

박병석, 수교 이전 중국 취재

5선의 박병석 민주당 의원은 이번에 대전 서갑에 다시 공천을 받았다. 박 의원은 중앙일보 기자 출신이다. 1952년 충남 대전광역시 출생으로, 대전고와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중앙일보 사회부, 경제부 기자, 홍콩 특파원을 거쳐 정치부차장과 경제부장, 산업부장, 편집국 부국장까지 지냈다. 그는 1984년 10월25일자 3면기사 ‘상해서 울려퍼진 애국가’에서 상해에서 열린 ‘아주 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한국팀이 개최국 ‘중공’에 역전승을 거두며 애국가가 연주됐다며 그런데 정작 KBS와 MBC 모두 상해에 기자를 파견했음에도 감격스런 실황을 중계하지 않아 실망을 안겨줬다고 비판했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중공당국과 국민들이 우리 나라명을 ‘남조선’이 아닌 ‘한국KOREA’로 중계된 것을 봤다며 “그들의 느긋한 성격 ‘만만디’를 되새기면서 한국의 성숙된 외교를 기대한다”고 내다봤다.

박 전 기자는 1989년 홍콩특파원 시절 6·4 천안문 사태를 취재하다 ‘중국 자오쯔양 총리 체포 구금’ 보도를 해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7년 12월까지 중앙일보 경제부장 겸 편집부국장을 지내다 수평적 정권교체 직후인 1998년 4월 새청지국민회의 수석부대변인으로 옮겼다. 이듬해엔 자신의 기자생활을 정리한 ‘이 기사를 조간에 꼭 실어야겠는데요’라는 책을 썼다.

배재정, 경제부 금융담당

부산 사상에 나선 배재정 후보는 부산대 영문과 86학번으로 1989년 부산일보에 입사해 2007년까지 20년 가까이 주로 경제부에서 근무했다. 배 기자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전엔 경제부 유통담당을 맡아 생활경제 기사를 주로 썼다. 잠시 문화부로 옮겼다가 IMF 전후엔 금융 관련 기사를 썼다.

배 기자는 1999년 6월17일자 6면 ‘외환수수료 인하와 신관치금융’이란 기자수첩에서 “시중은행들이 줄줄이 ‘수출 활성화’를 내걸고 외환수수료와 환가요율 인하에 나섰다”며 “(이런) 수수료 인하 바람 뒤에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썼다. 배 기자는 DJ 정부에서도 관치금융의 악몽이 재현될 것을 우려했다. 당시는 IMF로 은행들이 줄도산하는 과정에 막대한 국민 세금을 쏟은 직후였다. 배 기자는 “근거 없이 정부정책 좇아가기식 영업에 매달리면 수익성이 또다시 악화돼 결국 국민 부담만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정부의 신관치금융을 비판했다.

배 기자는 노무현 이회창 후보가 맞붙었던 대선 때인 2002년 12월6일자 9면 ‘유세장 전락한 토론회’라는 칼럼에서 대선을 앞두고 당시 부산 현안이었던 문현금융단지 활성화 대토론회에 ‘한나라당 1번 이회창’이란 어깨띠를 두른 지역 의원들이 예고 없이 나타나 노골적인 이회창 후보 유세를 벌이다 토론회 시작과 함께 퇴장한 해프닝을 비판했다.

배 후보는 2007년 부산일보를 나와 2011년까지 부산국제광고제 조직위원회 홍보실장과 2012년 부산문화재단 기획홍보팀장을 지내다가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 비례대표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6년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낙선한 뒤 2017~2018년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번엔 4년 전 고배를 마신 지역구를 다시 노린다.

노웅래, 2% 부족했던 노동보도

노웅래 예비후보는 민주당 5선 국회의원에 민선 마포구청장을 2번이나 지낸 노승환 전 국회부의장 아들이다. 1982년 매일경제신문에 입사했다가 곧 MBC로 옮겨 20년 가까이 다니다 2004년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됐다. 2008년 총선 땐 고배를 마신 뒤 3선까지 성공했다. 2000년대 초 2년간 언론노조 MBC본부장을 지냈다.

노웅래 MBC 기자는 1987~1990년 격변기를 사회부에서 보냈다. 정부의 불허와 봉쇄를 뚫고 1989년 5월28일 연세대에서 열린 ‘전교조 출범식’을 단독 보도했다. 1990년 3월9일엔 서울 마포구 망원동 지하 셋방에 사는 30대 맞벌이 엄마 아빠가 4살, 5살 난 어린 남매가 불안해 방문을 밖에서 잠근채 일하러 갔다가 집에 불이 났는데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숨졌다. 노 기자도 그 현장을 취재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사 갈등이 심해졌다. 노 기자는 1989년 4월20일 뉴스데스크에 ‘병원 노사 분규로 인한 환자 불편 심각’이란 리포트를 냈다. 불편한 게 당연한 파업을 보도하면서 ‘불편’에만 집중했다. 이후 노사 갈등의 배경과 원인은 따지지도 않고, 병원노동자는 파업만 하면 ‘환자를 볼모로 한’이라는 수식어가 자동으로 생성되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노 기자는 시사매거진 2580팀에선 ‘나이트클럽 탈세’ ‘부실도시가스’ 등 굵직한 보도를 했다. 사회부에 있다가 경제부로 옮겨 IMF 땐 재벌 도산과 기업 인수합병을 주로 취재했다. 당시 노 기자가 보도한 ‘해고없이 기업 군살빼는 분사제도에 관심 집중’(1998년 8월18일), ‘대기업 구조조정 새 모델로 분사 각광’(1998년 11월20일)은 해고보단 분사나 아웃소싱이 더 인간적이라는 시선을 담았다. 당장 사람을 자르는 게 아니라서 당시엔 그랬을 수 있다. 

현대차노조의 정리해고 파업을 정리하는 노 기자의 1998년 8월24일자 ‘현대차 분규타결에 3개월 소요, 회사 손실액 1조원’ 기사도 아쉽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여당 최고위원으로 울산에 내려가 노사 양측을 중재했고 이를 취재한 노 기자는 3선 여당 의원이 됐다. 노 기자 기사에 등장하는 김광식 현대차노조 위원장도 지금은 울산 중구에서 총선 예비후보로 나섰다가 임동호 후보에게 밀렸지만 민주당원이다.

▲ 1998년 8월24일 당시 MBC 기자였던 노웅래 의원이 보도한 리포트. ⓒMBC
▲ 1998년 8월24일 당시 MBC 기자였던 노웅래 의원이 보도한 리포트. ⓒMBC

박광온, 미디어법에서 가짜뉴스까지

1957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박광온 민주당 의원은 고려대 사회학 석사,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다. 박 의원은 이번에도 경기 수원정에 공천을 받았다. 1984년 기자로 입사한 MBC에서 도쿄특파원, 국제부장, 정치부 차장, 정치담당 전문기자, 정치·국제에디터 등을 지낸 뒤 보도국장에 올랐다.

이명박 정부 들어 보도국장에서 밀려난 것을 두고 ‘미디어법 개정’ 반대 목소리를 꾸준히 내는 등 정부 비판적 목소리를 낸 결과로 해석됐다. 2009년 7월 한나라당(미래통합당 전신)의 ‘미디어법 날치기 표결’을 국회사무처가 합법이라 판단한 것을 두고 “국회사무처, 중립성이 생명”이라는 논평을 냈다.

그밖에 박 의원은 MBC 기자 때 베를린장벽 붕괴, 걸프전, 남극세종기지 등을 취재했다. ‘뉴스데스크’와 ‘뉴스와 경제’, ‘일요 인터뷰 人’, ‘100분 토론’ 같은 주요 프로그램 진행도 맡았다.

2012년 문재인 대선 캠프 홍보본부장과 대변인으로 정계에 진출한 뒤 19대, 20대 때 모두 민주당 계열 후보로 경기 수원정에서 당선됐다. 2015년 비문 인사로서 문재인 당시 당대표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되고선 대언론 업무를 주로 맡았다. 민주당 홍보위원장,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 민주당 수석대변인, 국정기획자문위 대변인 등을 경험했다. 언론의 ‘네거티브’에 직접 대응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2018년 10월 민주당 허위조작정보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뒤 소위 ‘가짜뉴스’, ‘허위조작정보’ 대책을 강조하고 있다. 박 후보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민주당 최고위원회 회의때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이어간다. 특히 유튜브·페이스북 등 글로벌 플랫폼 사업자가 ‘국내법 사각지대’에 있다고 비판하곤 하는데, 정보인권단체는 대책 자체가 표현의 자유 침해 우려도 있고 해외기업 규제를 주장하는 건 현실성·당위성이 떨어진다는 반응도 있다.

양기대, 열혈 사회부 기자

민주당 경기 광명을 출마를 준비중인 양기대 예비후보는 1962년 군산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서울대를 나와 1988~2004년까지 16년간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다. 윤영찬 후보의 동아일보 2년 선배다. 양 기자는 요즘 세간에 자주 오르내리는 법조 출입기자를 주로 지냈다. 1992~1993년 2년, 1995년 다시 1년 등 법조 기자만 만 3년을 했다.

양 기자는 1992년 첫 법조 출입 때 조폭 김태촌 재판기록을 끈질기에 뒤져 검찰내 비호세력에 문제제기하는 기사를 썼다. 검찰을 정면 비판하는 법조 기자로 출발해 첫 단추를 제대로 뀄다.

양 기자는 기자상도 수없이 받았다. 1995년엔 이형구 전 노동부장관 수뢰, 1996년엔 전두환 5공 신당 창당기도, 1997년엔 김현철 비리 보도로 상을 받았다. YS 아들 김현철 기사는 한국기자상까지 받았다. 양 기자는 기자협회 기자상을 7번이나 받았다.

양 기자의 1998년 ‘판문점 총격 요청’ 보도는 ‘총풍’으로 불리며 한국 정보기관의 민낯을 드러냈다. 양 기자는 본의 아니게 동아일보 법조팀을 떠나야 했다. 양 기자가 법조 반장 때 노태우 전 대통령이 대우, 동아, 대림에서 원전 건설 관련해 거액을 받았다고 1면 톱기사를 썼다. 그런데 신문엔 ‘대우, 동아’가 빠졌다. 양 기자는 회사 컴퓨터에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이른바 ‘컴퓨터 대자보’ 사건이다.

양 기자는 한 인터뷰에서 “전두환 초기 때 대학 다녔는데 많은 젊은이가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도 가고 군대도 끌려갔다. 마음은 있었지만 적극 나서지 못했다. 이런 부채를 갚아야겠다”는 마음에 기자가 됐다고 했다.

‘기자의 본분이 사회 감시와 비판’이라고 했던 양 기자는 동아일보를 나와 2004년, 2008년 총선에서 전재희 후보에게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2년 뒤 광명시장 선거에 당선돼 재선까지 했다.

이석형, 논두렁PD 퇴사 석달뒤 군수 당선

광주 광산갑을 노리는 이석형 후보는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함평농고를 거쳐 전남대 농대를 나왔다. 이석형 후보는 1987~1998년 11년을 광주KBS에서 프로듀서 생활을 했다.

이석형 PD는 별명이 ‘논두렁 PD’였다. 농고와 농대를 나와 광주전남 방송 현업 땐 자연 다큐에 집중했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엔 늘 ‘흙냄새’가 났다. 이 PD는 철새나 뱀장어처럼 늘 자연에서 프로그램 소재를 찾았다. 그가 만든 다큐 ‘신비의 뱀장어’는 2년여 뱀장어를 추적한 결과다.

동학 농민봉기를 담은 ‘동학 사랑방 이야기’와 광주민주화운동이 첫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 5·18 행사를 방송3사가 공동으로 지방생중계한 것도 이 PD 작품이다. 이어 그는 3부작 다큐 ‘광주 100년’도 만들었다.

논두렁 PD답게 막거리 타입의 전형적인 농부형이다. 이 PD는 1998년 3월9일 KBS에 사표 내고 그해 6월4일 함평군수에 만 39살에 당선됐다. 이후 3선까지 했다. 군수 시절 함평 나비축제로 히트쳐 교과서에도 실리는 지역축제가 됐다. 나비축제도 PD 시절 나비 관련 다큐를 제작한 경험에서 나왔다. 나비도 살리고, 나비가 서식할 환경은 곧 농약 없는 농업을 뜻하기에 자연스레 함평의 친환경 농업 홍보에도 딱이었다.

그는 언론사 퇴사 석 달도 안돼 군수가 됐다고 자랑했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부적절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모교 레슬링부를 주제로 한 다큐도 좀 아쉽다.

박성준, 꾸준한 통일·정치 관심

서울 중구성동구을에 전략공천된 박성준 민주당 후보는 1969년 충남 금산 출생이다. 1996년 KBS 23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해 대전방송총국에서 근무하다 2011년 종합편성채널 JTBC로 이적했다.

박 후보는 갓 개국한 JTBC에서 방송 총괄 뿐 아니라 신진 아나운서 육성도 했다. 본인도 JTBC에서 다양한 시사프로에 출연해 대중에 얼굴을 알렸다. JTBC ‘시청자의회’, ‘박성준의 직격토론’, ‘뉴스아침&’, ‘뉴스현장’, ‘진실추적자 탐사코드’, ‘사건반장’ 등이다.

지난 1월 갑자기 출연하던 ‘사건반장’에서 하차했고,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입당으로 이어졌다. 출연하던 프로에서 갑자기 하차하고 정치권에 직행해 비판을 불렀다.

박 후보는 아나운서라는 직업 이전에 정치학도로 학업을 이어왔다.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박 후보는 KBS 때 충남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성균관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특히 통일 행사에 꾸준히 참여했다. 2006년 한국크리스천과학기술인포럼 주최 ‘통일을 준비하는 기독 과학기술인의 역할’ 포럼, 2011년 대전충남종교인평화회의 주관 통일준비 세미나 등에서 발표했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때에는, 북한 평양의 개성공단 방문 경험을 충청지역 언론 ‘디트뉴스’에 기고했다.

박 후보는 한국아나운서협회 부회장이었던 2010년 KBS, MBC, SBS 비롯 8개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들의 중국 방송사 방문에도 참여했다. 비슷한 시기 국회의원이었던 강용석씨가 “아나운서 하려면 다 줘야”는 말로 물의를 빚어, 아나운서협회 차원에서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에도 참석했다.

박무성, 평기자에서 대표이사까지

부산 금정에 출사표를 낸 박무성 예비후보는 신문사 평기자부터 사장까지 올랐다. 박 후보는 부산대 사회학 석사를 받은 뒤 1990년 부산 국제신문 기자로 입사했다. 경제부를 거쳐 사회부에서 취재하다가 사회부장, 경제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문화사업국장으로 갔다가 편집국장이 됐다. 2018년 10월 국제신문 대표이사가 됐다.

앞서 논설주간을 지내는 동안 게재한 기명칼럼 중엔 여당 관련해 주로 ‘세대’에 집중했다. 2018년 4월 부산시장 선거 당시 “‘올드 캠프’가 더 문제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부산이 이대로는 안 된다’며 한 표를 호소하는 후보들이라면 캠프라도 참신하고 미래지향적 인물들을 불러모아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유권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했다.

8월엔 민주당 김진표-이해찬 당시 당대표 후보를 비롯한 정당 지도부를 두고 “70대가 주축을 이뤘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보다 겨우 몇 년 ‘어린 것’ 아니냐는 비아냥도 나온다”며 “올드 보이들의 재탕 경연장이 벌어지는 악순환 속에서 미래로 전진하기는 어려운 법”이라 비판했다.

한편 대표이사 선임 1년여 만에 사임, 한달 만에 총선 출마를 위해 민주당에 입당한 박 예비후보에게 국제신문 내부의 비판이 제기됐다.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국제신문 노조는 그를 두고 “침몰 직전의 난파선에서 홀로 탈출한 무책임과 무능, 몰염치의 선장”, “재임 시절 내내 편집권을 유린한 것은 물론 직원에게 각종 수당과 상여금까지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 경영으로 일관” 등 비판을 쏟았다.

▲ 21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언론인 출신 주요 인사들.
▲ 21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언론인 출신 주요 인사들.

김종민, 노무현의 언론전쟁 지켜봐

김종민 민주당 의원은 충남 논산·계룡·금산 지역구에서 재선에 도전한다. 충남 논산 출신인 김 의원은 1983년 입학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민족해방(NL) 계열 운동권으로 활동하다 ‘구국학생연맹’(구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적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일신문에 입사해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당시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1999년 시사저널에 입사해 정치팀장을 맡았다. 노 전 대통령이 해양수산부장관과 민주당 상임고문을 거쳐 대권에 도전하기까지 과정을 취재했다.

김 의원은 기자 시절 종종 언론과 정치인 관계를 조명했다. 일례로 김대중 정부 초기 ‘언론문건 파동’을 계기로 소위 ‘정치기자’와 정치권 유착관계를 지적한 “낮에는 언론인, 밤에는 악어새” 기사가 있다. DJ와 일부 언론이 각을 세우기 시작한 시점엔 “DJ 정권이 이미 핸들을 뽑아 버렸다면 관건은 이에 맞서는 ‘조·중·동+한나라당’ 스크럼이 유지되느냐는 점”이라 보도했다.

‘노 전 대통령과 가장 많이 인터뷰한 기자’로서 면모가 드러난 기사가 많다. 노 전 대통령이 민주당 상임고문 시절 ‘비보도 파기’ 관행에 불만을 표한 이야기, “조선일보는 이회창 편들기 중단하라” 인터뷰 등이다. 노 전 대통령은 “방(우영) 회장이 손을 떼고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 자유를 되찾게 되면 조선일보 크게 달라질 것”이라 주장했다.

김 의원은 이후 시사저널에서 퇴사해 한 투자신탁회사에 다니다 2003년 노무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정치권에 들어왔다. 2004년 40세로 최연소 청와대 대변인이 됐고, 충남 정부무지사,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지금의 지역구에 출마했던 이인제 자유선진당 후보에 낙선, 20대 총선 ‘리턴매치’에서 당선됐다.

이규민, 13년간 안성신문 키워

이규민 민주당 경기 안성시 국회의원 후보는 1968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안성고, 동국대를 졸업했다. 2000년 심규섭 민주당 의원(안성) 보좌관을 지냈고 2003년부터 2015년까지 안성신문에서 언론인으로 살았다.

안성신문 발행인 바이라인으로 검색되는 기사는 2005년 6월7일자 안성 뉴타운 택지개발 관련 박정오 안성시 부시장과 대담 기사다. 2004년 말 한국토지공사와 안성시가 지역종합개발사업 기본협약을 체결했다. 당시 이 발행인은 택지개발의 배경과 의미뿐 아니라 우려할 점과 개발 이후 지역의 변화 등을 물었고, 안성의 숙원사업인 전철 유치를 부시장에게 주문하기도 했다.

이 후보자는 ‘이규민의 웹자서전’에서 안성신문 발행인으로서 경영이 어려운 지역신문의 실태를 회고했다. 돈을 빌리러 다니거나 사비를 털어 넣은 일화, 적자가 쌓여 결국 휴간했던 이야기 등을 적었다.

안성신문은 이 후보자가 발행인을 관둔 2015년 이후 정치행보에 나선 그의 동정기사를 다뤘다. 안성신문 홈페이지에서 ‘이규민’을 검색하면 이 후보자의 2015~2016년 20대 국회의원 출마 관련 소식, 2018년 안성시장 출마 관련 소식, 경기도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 사무총장 취임, 21대 총선 출마 관련 소식 등 21건의 기사가 나온다.

김유화, 베스트시의원 출신 

김유화 민주당 전남 여수시갑 예비후보는 1964년 출생해 전남대에서 신문방송학·언론학으로 학사와 석사, 서강대 영상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 대학을 졸업하고 여수MBC에 입사해 1998년까지 아나운서로 근무했다.

2017년부터 민주당 전남도당부위원장으로 있으면서 2019년 3월부터 복지TV 전남방송본부(전남방송) 사장을 맡았다. 2019년 10월부터는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국민소통 및 지역협력 특별위원회 위원으로도 위촉됐다.

김 예비후보는 복지TV 전남방송 사장 취임 두달 뒤부터 ‘김유화의 행복소통’이라는 인터뷰 코너를 33회 진행했다. 사회복지관장, 시민단체 대표, 지역사회연구소장, 시인 등 전남 지역사회 각계 인사를 만나는 방송이었다. 김 예비후보는 총선 출사표를 던진 다음날인 지난해 12월19일 서인덕 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과 30여분간 인터뷰해 그가 펼친 매니페스토 운동, 선거제도 등을 소개했다.

복지TV 전남방송은 김 예비후보가 지난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여수시의원을 했는데 이 당시 활동과 지난 1월 김 예비후보의 북콘서트 소식 등을 보도했다.

김 예비후보는 2017년 여수시청공무원노조가 선정한 베스트 시의원, 여수의정대상,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2016 지방의원 기초의원 ‘좋은조례분야’ 등을 수상했다.

김영호, 첫 스포츠지 출신 정치인

김영호 민주당 서울 서대문을 후보자는 1967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마포고, 베이징대를 나와 서강대 대학원에서 중국학 석사학위를 마쳤다. 김 후보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 김상현 전 민주당 상임고문의 셋째아들이다. 김 후보자의 배우자는 EBS 아나운서 출신이다.

김 후보자는 언론사상 처음으로 스포츠지 기자로 정치권에 진출한 인물이다. 그는 1998년 1월 국민일보에 입사했고 1999년 5월 스포츠투데이로 옮겨 정경부, 뉴스부, 연예부를 거쳐 한중문화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2003년 10월 언론에서 김 후보자가 아버지의 오랜 지역구인 서울 서대문갑에 출마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사의를 표했다.

당시 언론에선 아버지 후광으로 정치에 나선 전직 대통령의 아들에 김 후보자를 비유하기도 했다. 이에 김 후보자는 당시 불쾌감을 드러내며 아버지 고향에서 출마하는 이들과 본인이 태어난 서대문에 출마하는 자신의 상황이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언론인의 정계진출을 비판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아버지 영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언론인 신분을 이용해 공천을 따낸 건 아니라고 반박했다.

김 고문과 김 후보자 부자는 17대 총선에 함께 출마했지만 둘 다 낙선했다. 김 고문은 정계를 은퇴했고, 김 후보자는 18대, 19대에도 낙선한 뒤 20대 국회에 진출한 초선의원이다.

양문석, 지난해 보궐선거 패배 뒤 재도전

양문석 민주당 후보는 지난해 보궐선거에서 패한 경남 통영고성에 재도전한다. 양문석 후보는 학생운동 끝에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학 박사까지 땄다. 양 후보는 언론노조에서 2002년부터 3년간 정책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MBC 미디어비평 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려 EBS와 KBS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잠깐 ‘말’지 기자도 하고, 미디어오늘 객원논설위원도 했다. 크게 2006년부터 3년 넘게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도 지냈다.

양 후보는 미디어스와 공공미디어연구소도 만들었다. 2010년 7월엔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이 돼 3년 반을 재직했다. 2011년 9월20일 국회 국정감사 기간에 최종원 민주당 의원과 함께 서울 강남 룸살롱에서 KT 임원에게 술 접대를 받은 사실이 한겨레 1면 보도로 알려져 자숙했다. 양 후보는 얼마 뒤 KT와 방통위에 사과했다.

2014년 3월 방통위 위원을 마친 뒤엔 종편에 패널로도 자주 출연했다. 2019년 4·3 보궐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36%를 얻어 정점식 통합당 후보에게 패했다. 그가 출마한 경남 통영·고성 지역구는 늘 인구가 2배 많은 통영 출신이 당선됐으나, 지난해 처음 고성군 출신인 정 의원이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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