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국민동의청원 1호로 처리했다고 알려진 ‘텔레그램 디지털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이 충분한 논의 없이 국회 본회의에 부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청원 취지가 반영된 법안’이 통과했다는 홍보가 이어지자 청원인이 속한 단체가 이를 “허위 보도”라 반박하기에 이르렀다. 국회가 국민청원 제도 홍보에 ‘n번방 청원’을 활용하고 정작 ‘졸속 처리’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자 지원 단체인 ‘프로젝트 ReSET(Reprting Sexual Exploitation in Telegram)’은 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청원’을 본회의에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성폭력 특례법 개정법률안에 취지를 반영하기로 하였다며 폐기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청원의 취지를 반영하였다는 개정법률안에는 딥페이크 처벌 관련 조항이 신설된다는 내용만이 들어있었다”며 “이는 디지털 성범죄의 근절을 요구한 청원인은 물론 청원에 동의한 국민들의 민의에 부응하지 않는 직무태만”이라 비판했다. ReSET은 관련 청원인이 설립해 약 3개월간 활동 중인 단체다.

지난 1월 등록된 청원은 디지털성범죄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경찰의 국제공조수사 △수사기관의 디지털성범죄 전담부서 △2차가해 방지 포함한 대응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텔레그램에서 여러 개의 대화방을 만들어 주로 미성년자 여성의 성착취물 영상을 게재해 금전거래를 하는 이른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계기로 제기됐다. 지난달 10일 처리요건인 10만인 동의를 받았다.

▲ 국회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 갈무리.
▲ 국회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 갈무리.

청원인은 당시 “더 심각한 것은 디지털성범죄의 표적이 매우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여자 연예인, BJ, 지인 얼굴을 합성하는 ‘딥페이크 포르노’, 생활공간을 불법촬영한 사진 및 영상 또한 텔레그램을 통해 유포·매매되고 있으며 유포자·소비자들은 피해자들을 향해 성희롱과 2차가해 발언을 한다. 이런 텔레그램 채널은 딥페이크 포르노 제작·판매방, 불법촬영물방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며 “이는 텔레그램을 통한 여성착취가 단순히 ‘n번방’에 국한되지 않으며 피해자가 결코 소수가 아님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청원 논의는 첫 단계에서 멈췄다. 지난 3일 법사위 제1소위원회(위원장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회의록을 보면 의원들은 접수된 청원이 아닌 기존에 발의됐던 ‘딥페이크 처벌법’ 만을 심의했다. 요컨대 ‘디지털 성범죄 관련 청원이 회부됐는데, 기존에 발의된 법안 중 디지털 성범죄 관련은 딥페이크 처벌법’이란 논리다. 논의 도중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n번방 사건은 이것하고는 좀 다른 형태 아닌가”라고 한 차례 의문을 제기했으나 그뿐이었다. 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의 경우 ‘n번방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날 회의에서 “청원한다고 법 다 만드냐”(김도읍 미래통합당 의원)며 볼멘소리를 한 의원도 있었지만 실상은 청원 취지를 따져보는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딥페이크 처벌법은 신체 등 영상물을 대상자 의사에 반해 성적 욕망·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형태로 편집한 행위 처벌, 반포 행위에 대한 가중처벌이 골자다. 디지털성범죄 처벌의 사각지대를 좁혔다는 의의가 있지만, 진화하는 디지털성범죄와 관련해 수사·전담부서·처벌규정 등 전반을 정비해야 한다는 청원 내용들은 지워졌다.

그러나 국회는 ‘청원에 따라 국민 뜻이 반영된 법안이 통과됐다’고 홍보했다. 법사위가 청원을 본회의에 올리지 않기로 한 3일에도 “‘제1호’ 국민 목소리, 법안에 반영됐다”, 청원 내용 대신 딥페이크 처벌법이 본회의를 통과한 5일엔 “디지털 성범죄 처벌을 강화해 달라는 ‘제1호 국민동의청원’의 목소리가 성폭력처벌특례법에 반영됐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언론도 홍보에 일조했다.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 국회 통과…국민 청원 ‘1호 법안’”, “n번방 사건‘ 방지법 본회의 통과…국회 온라인 청원 첫 입법”,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 국회 통과…디지털성범죄 방지” 등 보도가 잇따랐다.

▲ 지난 5일 국회 본회의 결과를 전하는 언론 보도들(네이버 뉴스검색 결과).
▲ 지난 5일 국회 본회의 결과를 전하는 언론 보도들(네이버 뉴스검색 결과).

ReSET은 “이번 법사위를 통해 가해 수법 중 하나인 ‘딥페이크’ 기술에 대한 처벌 방안은 마련되긴 했다. 그러나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청원이 본회의에 단독으로 상정되지 않았다는 점, 상시적 국제공조수사 등이 텔레그램 및 추후 해외 플랫폼에서 일어날 디지털 성범죄에 제대로 된 해법임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미비했고 정책적인 압박 수단에 대한 제시도 없었다는 점 등 문제점이 많다”며 “청원내용이 매우 축소돼 소극적 결과를 마주하게 된 데 큰 유감”이라 지적했다.

덧붙여 “언론은 국민동의청원의 요구사항과 딥페이크 처벌 개정법률안의 골자가 명백히 다름에도 국민의 뜻을 반영한 법안이 만들어졌다는 내용의 허위 보도를 연이어 내보내고 있다. 이러한 허위보도는 청원의 취지를 축소·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한 뒤 “딥페이크 합성 범죄는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성범죄의 유형 하나 중 하나일 뿐이다. 청원 원안의 취지대로 디지털 성범죄 전반에 대해 실질적인 단속 강화 및 처벌 강화가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도 11일 “이번 개정안은 그동안의 성착취 문제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에 국회가 응답하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미흡하고 졸속적”이라며 △성적 촬영물 유포를 빌미로 협박하는 행위 처벌 △성적 이미지를 온라인에 전시·공유하는 경우 '집단 성폭력' 등 개념 도입해 가중처벌 △불법촬영물 소지죄 처벌 △불법촬영물 삭제 불응 시 처벌 △온라인서비스제공자 의무 명시 및 의무 불이행 처벌 △성폭력 범죄 구성 요건을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에서 ‘타인의 의사에 반하여 타인의 신체를 성적으로 침해하는’ 모든 행위로 확대 △온라인 그루밍 개념규정과 형법상 처벌법 도입 등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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