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6일, 내가 살고 있는 서울시 동대문구의 한 공동체가 현수막을 걸었다. 여성의 날을 며칠 앞두고 투표를 독려하는 프레이즈가 걸린 현수막이었다. “3·8 여성의 날. 나는 성평등에 투표합니다”라는 문장 한 줄 이었다. 그런데 하루가 되기도 전에 현수막이 사라졌다. 사정을 물어보니 해당 지역 선거관리위원회가 그 현수막 게시를 선거법 위반으로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선관위는 단체에 자진 철거 요청과 함께 미철거시 선거법 위반 행위에 대한 조사와 강제 철거를 진행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선관위는 “나는 성평등에 투표합니다”라는 문구가 “선거운동에 이르지는 않지만 성평등과 관련된 공약을 제시하는 후보에게 유리한 영향”을 간접적으로 미치기 때문에 “선거의 공정을 해 함으로써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고 해석을 보내왔다. 

선거기간 동안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이 내건 현수막과 선전물이 선거법 위반으로 제재된 사례는 이번 만이 아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이런 선관위의 ‘경고’가 통보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평등 현수막 하나의 철거가 올해 선거에 던지는 의미는 또 다르다. 

훗날 21대 총선은 ‘코로나19 총선’으로 기억될 지도 모르겠다. 역대 어떤 선거보다 쟁점이 없고 모든 이슈가 코로나19 사태의 정치적 책임 공방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불러오고 있는 더 큰 정치적 영향은 정치권의 고립과 시민과의 소통 부재다. 시민들의 활동 반경이 극도로 좁아지고 어떤 공적 모임도 열리지 못하는 지금, 각 정당은 오직 여론조사의 수치와 시뮬레이션 결과만을 바라보고있다. 선거운동을 해 본 사람이라면 선거구의 판세가 이런 데이터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지난 20대 총선 종로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 구로콜센터 코로나19 집단 발생지 3일째 되는 날인 3월12일 오후 서울 구로구 코리아빌딩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검체검사를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구로콜센터 코로나19 집단 발생지 3일째 되는 날인 3월12일 오후 서울 구로구 코리아빌딩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검체검사를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코로나19의 정치화, 그리고 면대면 접촉이 어려운 상황은 결국 선거 이슈를 누더기가 되어 버린 비례의석을 둘러싼 합종연횡만으로 좁혀놓고 있다. 정책 대결을 바라지 않더라도 이전 선거에서는 그래도 몇 개의 쟁점과 이슈들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총선처럼 정치권의 의석 게임만으로 이슈가 좁혀지면 선거는 ‘그들만의 리그’가 된다. 복잡한 경우의 수와 신뢰할 수 없는 시뮬레이션 결과는 미래한국당이든 비례연합이든 대체 무엇을 위해 의석이 필요한지 잊게 만든다. 

“나는 성평등에 투표합니다”라는 한 줄의 문장이 지워진 일은 그래서 더욱 답답하다. 후보와 정당의 선거 벽보와 공보도 없는 시기에 현수막 한 장을 통해 보편적 인권에 대한 지지를 밝히는 것은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후보 모두에 대한 공약 요구다. 이런 요구를 거두라는 선관위의 관행적인 제재는 결국 유권자에게는 침묵을, 각 정당에게는 자신들만의 시뮬레이션에만 몰입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번 총선의 이슈가 없지는 않다. 미래통합당이 위성정당을 통해 비례 의석 다수를 차지하면 코로나19 대응의 책임을 물어 대통령이 탄핵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이다. 결국 총선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본인 시민의 요구와 정책의 발굴보다 대통령을 위한, 대통령을 향한 공방전이 돼버렸다. 

2017년 3월,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었을 때 모든 정당은 한 목소리로 지나치게 권력이 대통령에 집중된 정치체제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나 개헌을 비롯한 정치개혁이 실패하면서 여전히 우리는 의회정치가 실종된 대통령 중심의 정치체제를 재생산하고 있다.

▲ 코로나19 여파로 국회가 임시폐쇄된 2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거리에 더불어민주당의 “코로나19 전국민 총력대응, 함께 이겨낼수있습니다!”(위) 현수막과 미래통합당의 “중국인 입국 금지요청 근거법 마련하겠습니다, 우한 코로나19, 대한민국은 반드시 극복합니다!” 현수막이 함께 걸려 있다. ⓒ 연합뉴스
▲ 코로나19 여파로 국회가 임시폐쇄된 2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거리에 더불어민주당의 “코로나19 전국민 총력대응, 함께 이겨낼수있습니다!”(위) 현수막과 미래통합당의 “중국인 입국 금지요청 근거법 마련하겠습니다, 우한 코로나19, 대한민국은 반드시 극복합니다!” 현수막이 함께 걸려 있다. ⓒ 연합뉴스

언제나 그랬듯 이제는 낯설지도 않은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이라는 해석으로 사라진 현수막 한 장은 달라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욱 무력화된 한국의 민주주의를 보여준다. 성평등 뿐 아니라 노동권 보호, 보건의료 서비스 강화, 차별금지법 제정, 기본소득의 요구까지 시민사회가 정당과 후보들에게 요구할 정책과 공약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현수막이든 벽보든 이런 요구들이 많아질수록 각 정당과 후보들은 정책과 공약에 대한 더 많은 고민과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도 후보들은 지역 사회의 목소리를 듣고 있기는 하다. 언제 어디서 하는지도 모르는 지역 유지와 ‘당원’들과의 모임에서 말이다. 소위 ‘풀뿌리 보수 카르텔’과의 소통이 그것이다. 그들과의 만남이 “나는 성평등에 투표합니다”라는 현수막 게시보다 더 ‘공정한’ 선거, 내가 이번 선거에 기대를 접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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