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지난 5일 창간 100년을 맞아 ‘조선일보 100년을 만든 33인’ 중 하나로 최은희 기자를 꼽았다. 조선일보는 “민간지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는 두둑한 배짱으로 사회부에서 맹렬한 활동을 펼쳤다”고 소개했다. 지난 6일 서울신문은 칼럼에서 이각경 기자를 소개했다. 이 신문은 “(서울신문 전신이자 조선총독부 한글판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1920년 한국 언론 최초로 여기자 채용을 공고해 ‘한국 언론 1호 여기자’ 이각경 기자를 탄생시켰다”고 했다. 

미디어오늘은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최초 여성기자를 소개한다.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 1918년 일본에서 여성유학생들 중심으로 발간한 잡지 ‘여자계’에서 주간 및 기자로 활동했다. 1919년 말 승려이자 시인 김일엽이 잡지 ‘신여자’를 직접 창간해 기사를 썼다. 김일엽은 이후 매일신보, 동아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다만 나혜석과 김일엽은 기자 이외 활동으로 더 주목을 받았고 잡지에서 기사를 썼기 때문에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한 이들이 최초 여성기자로 평가받는다. 2008년 여성부가 이각경 매일신보 기자(1920년 입사)를 찾아내기 전까지 최은희 조선일보 기자(1924년 입사)가 최초 여성 신문기자로 알려졌다. 매일신보가 당시 총독부 한글판 기관지여서 이제 최 기자는 ‘최초 민간지 여성기자’로 불린다.

총독부가 조선·동아일보를 허가한 1920년, 매일신보에 최초로 여성기자가 입사했다. 유일하게 한글신문의 지위를 누리다 민간지와 경쟁에 돌입하며 택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같은해 7월1일 매일신보 사고를 보면 “가정개량과 여성계 개조를 위해 현숙하고 박학한 부인기자를 모집한다”며 응모자격을 ‘가장이 있는 부인(기혼여성)’, ‘20세 이상 30세 이하’, ‘고등보통학교 졸업 정도 이상으로 문필의 취미가 있는 부인’으로 정했다. 해당 첫 공채로 입사한 ‘부인기자’가 이각경 기자다. 

▲ 1920년 9월5일 매일신보 기사 “금회에 본사 입사한 부인기자 이각경 여사, 오늘 부인사회를 위하여 건전한 붓을 휘두를 목적”. 사진=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1920년 9월5일 매일신보 기사 “금회에 본사 입사한 부인기자 이각경 여사, 오늘 부인사회를 위하여 건전한 붓을 휘두를 목적”. 사진=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매일신보는 9월5일자 기사 “금회에 본사 입사한 부인기자 이각경 여사, 오늘 부인사회를 위하여 건전한 붓을 휘두를 목적”에서 이 기자의 입사를 알렸다. 이 기자는 조선사회가 예전부터 여성을 멸시해 남성의 종속적 물건으로 절대복종하고 무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게 잘못이며 자신이 기자가 돼 책임이 무겁다는 내용의 ‘입사의 변’을 발표했다. 같은달 14일 ‘부인기자의 활동’이란 제목으로 첫 기사가 나갔고, 이후 봉건적 가정을 비판하거나 신구 절충식 혼례를 다룬 기사 등을 썼다. 

1921년 1월1일엔 매일신보 1면에 논설 “신년 벽두를 제하야 조선 가정의 주부께”를 실었다. 이 기자는 이 글에서 “우리 조선은 날과 달로 변해가는 이 시대를 당하여 지난 시대의 범절만 지킬 수도 없고 또 나날이 달라가는 풍조를 다 숭상할 수도 없다”며 다만 여성계가 전통을 지키면서도 고칠 게 있으면 고쳐나가자고 주장했다. 

▲ 1921년 2월13일자 매일신보 "조혼의 악습을 타파"란 제목의 이각경 기자 기사. 사진=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1921년 2월13일자 매일신보 "조혼의 악습을 타파"란 제목의 이각경 기자 기사. 사진=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이 기자가 쓴 기사 제목을 보면 ‘자유와 개방적 생활-오늘날은 남자만 의뢰 말고 각기 자유롭게 활동해야’, ‘축첩에 대한 이해’, ‘시부모여 며느리도 자식이거늘 왜 그리 노예시하는가’, ‘조혼의 악습을 타파’, ‘조선 부인들의 아동교육’, ‘부인의 부업 필요’ 등 계몽 성격의 기사가 많았다. 

이 기자는 1897년 2월19일 경성에서 태어나 한성고등여학교(경기여고 전신) 사범과를 졸업했다. 일본으로 유학갔다가 집안 반대로 학업을 중단했다. 전우영과 결혼했는데 남편이 가정생활에 소홀했으며 시부모의 학대가 심해 기자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다. 이후 마포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1925년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소식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1936년 2월24일, 39세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이 기자의 한성고등여학교 동문이자 춘원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은 1925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학예부장을 맡았다. 허영숙 기자는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를 나온 국내 최초 여성의사이다. 서울 서대문에 최초 산부인과 병원 ‘영혜의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학예부장이었던 남편이 아플 때 이를 업무를 대신하다 기자가 됐다. 양육과 가정생활 관련 위생에 대해 기사를 쓰는 등 최초의 의학전문기자로도 알려졌다. 

최초 민간신문 여성기자로 활동한 최은희 기자는 동경 일본여자대학 3학년 재학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했다가 춘원 이광수의 권유 등의 이유로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총 8년 기자활동을 했는데 1년쯤 지났을 1926년 조선일보 신년호에 “난 여자의 수줍은 태도를 떠나 대담한 마음으로 부장의 분부를 받아 발길을 멈출 사이없이 자꾸 돌아다녔다”며 “조선여자들이 실제 나서서 활동하는 분야가 적고 여성사회가 얼마나 빈약하며 단순한가를 절실히 느꼈다”는 소감을 남겼다. 

최 기자는 거지굴 등 현장에 잠입해 현실을 기록했고, ‘가정부인’이란 코너를 만들어 기생·행랑어멈 등 소외된 여성의 삶이나 여성이 알아야 할 정보 등을 전했다. 유명한 특종은 1926년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사망 직후였다. 조선인들이 많이 모이자 일제 경찰들이 이를 예의주시했다. 최 기자는 심상찮은 경찰을 뒤쫓아 종로경찰서 취조실에 잠입해 방정환 등 6·10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이들이 잡힌 걸 확인해 쓴 6월7일자 “천도교 관계자·학생·직공 등 80명 피체(被逮)”였다. 

▲ 최초 민간지 여성기자인 최은희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사진=유튜브 '장영남, 최은희를 기억하여 기록하다' 화면 갈무리
▲ 최초 민간지 여성기자인 최은희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사진=유튜브 '장영남, 최은희를 기억하여 기록하다' 화면 갈무리

최 기자는 기자로 살면서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1927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한 여성들을 근우회를 만들어 모았다. 여성의 대한 사회·법률 철폐,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 폐지·결혼 자유, 인신매매·공창 폐지, 부인노동 임금차별 철폐·산전산후 임금지불 등 근우회 강령을 정하기도 했다. 3·1운동에 참여해 옥에 갇히기도 했다. 

최 기자는 1924년 12월 조선일보 주최 무선전화 시험 공개방송에서 조선인 최초 라디오방송 아나운서를 지냈고 1925년 7월 조선 여자 정구대회에서 여성 최초로 시구했으며 1927년 12월 여성기자로서 최초 서울 상공을 비행했다. 조선일보에서 8년간 기자로 있었고 1945년 해방 후 여성신문사와 주간생활신보사 고문을 지냈다. 1962년 대한여자국민당 서울시당수, 1971년 한글학회 지도지원 등을 역임했다. 

1984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 전에 조선일보에 5000만원을 맡겼고 ‘최은희 여기자상’을 84년부터 매해 5월 수여한다. 1회(1984년) 신동식 서울신문 기자, 11회(1994년) 이진숙 MBC 국제부(전 대전MBC 사장), 23회(2006년) 김순덕 동아일보 논설위원, 28회(2011년) 최현수 국민일보 군사전문기자(국방부 첫 여성대변인), 36회(지난해) 홍혜영 TV조선 기자 등이 이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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