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광복 이전엔 일제, 이후엔 권위주의 정부, 북한의 세습 독재와 맞서 싸웠다. 운동권 좌파의 괴담과도 맞섰다.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시대와 맞서고 시대를 이끌어온 100년이었다.” 3월5일 창간 100주년을 맞는 조선일보가 지난 2월29일자 1면 기사에서 지난 100년을 자평한 대목이다. 기사 제목은 ‘3·1운동으로 태어나, 불의한 시대에 저항했다’였다. 미디어오늘은 조선일보의 지난 100년을 100개의 장면으로 추렸다. 조선일보의 100년을 통해 우리 언론史의 굴곡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함이다. - 편집자 주 

▲ 조선일보
▲ 조선일보

01.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방응모는 1922년부터 5년간 평안북도에서 동아일보 신문지국장이었으며 신문 대금이 밀려 본사로부터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금광을 발견해 벼락부자가 되어 1933년 3월21일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02. 조선일보는 1924년 9월부터 1933년까지 사회주의 논조를 펴기 시작했는데, 1925년 3월14일 사설에선 칼 마르크스 42주기를 맞아 “노동계급 운동의 지도 원리의 계시자로서…용전역투하던 혁명가로서 천만 푸로레타리아트의 추앙과 존경을 받았다”며 찬사를 바쳤다. 
03. 1925년 9월 조선총독부는 반일감정을 담긴 사설이 있다며 조선일보를 정간 조치했고, 조선일보는 정간 조치를 풀기 위해 그해 10월 기자 17명을 해고했다. 
04. 조선일보는 이봉창의 폭탄 투척 사건이 있었던 1932년 1월10일자에서 “어료차(천왕의 마차)에 이상이 없어 오전 11시50분 무사히 궁성에 환행하시었다”고 보도했으며, 그해 5월8일자에선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을 “흉행(兇行)”으로 보도했다. 
05. 조선일보는 1933년 12월24일자 사설에서 일본 황태자 탄생에 맞춰 “새로 탄생하신 황태자전하께옵서 건전하게 자라시와 후일에 일본을 세계의 문화와 평화와 따라서 인류의 행복을 위하야 큰 공헌을 하는 큰힘이 되도록 하시는 영주가 되시옵소서 하고 축원을 올린다”고 적었다. 
06.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했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맡았던 이광수가 1933년 조선일보로 이직하며 조선과 동아의 관계는 매우 불편해졌다. 이광수는 조선일보에서도 편집국장을 맡으며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1933년 삼천리 10월호)라는 별명을 얻었다. 
07. 1935년 언론비평지 ‘쩌날리즘’에 실린 ‘동아 대 조선전의 진상 급비판’에 따르면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가 조선일보의 지면 광고 요구에 10원을 내겠다고 답하자 방응모는 조선일보 주필에게 “김성수에게 공세의 필봉을 향하라”고 명했다. 
08. 조선일보는 1935년 6월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가 교장으로 있는 보성전문학교의 신입생 초과 문제를 집중보도했으며, 그해 7월 서울 태평로 사옥 준공 이후 사설에선 “동아일보는 3층이고 조선일보는 4층이다”라고 썼다. 
09. 방응모는 1935년 잡지 ‘삼천리’와 인터뷰에서 “먹을 만한 것이나 남겨두고는 전부 사회사업이나 문화사업에 바치겠다.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해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0. 조선일보는 1937년 1월1일 1면에서 일왕 부부 사진을 1면에 크게 실었으며 1940년 폐간 전까지 매년 1월1일 일왕 부부 사진을 싣고 충성을 맹세했다. 

▲ 1939년 1월1일자 1면
▲ 1939년 1월1일자 1면

 

11. 조선일보는 1939년 4월29일 사설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맞아 생일축하문을 쓰며 충성을 넘어선 ‘극충극성’이란 표현을 쓰고 일왕을 ‘지존’이라 표현했다.
12. 일제의 조선어 말살로 조선일보는 1940년 8월10일 폐간당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따르면 당시 조선일보 직원은 912명이었으며, 총독부는 폐간 대가로 조선일보에 80만 원을 줬다. 당시 일본군 전투기 한 대가 10만 원이었다고 한다. 
13. 조선일보는 1945년 11월23일 속간사에서 “총독부의 횡포 무쌍한 탄압에 의해 눈물을 머금고 강제폐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14.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1950년 6월28일 조선일보는 호외를 내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경애하는 수령인 김일성장군 만세!”라고 적었다.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한 사실이 없으며 인민군이 조선일보사의 남겨진 시설을 이용해 만든 선전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 1950년 6월28일자 호외
▲ 1950년 6월28일자 호외.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한 사실이 없으며 인민군이 조선일보사의 남겨진 시설을 이용해 만든 선전물로 추정된다”고 밝힌 바 있다. 

15. 은행가 출신 장기영은 조선일보의 제의로 납북된 방응모 대신 1952년 4월부터 5년 임기로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발행부수·지대수입·광고 수입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방씨 일가와 갈등을 빚어 1954년 중도 퇴임했으며, 이후 한국일보를 창간했다.  
16. 조선일보는 4·19혁명 뒤인 1960년 4월26일 사설에서 “정의에 불타는 청년 학도들의 장거는 기어코 오늘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으니 비겁한 기성세대는 숙연히 젊은 세대 앞에 머리를 숙이고 애국청년학도의 순혈에 보답하는 사신(捨身)의 결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17. 조선일보는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호외에서 ‘군부 쿠데타’로 명명했지만 이틀 뒤인 5월18일 ‘쿠데타’란 단어는 사라졌고 19일 사설에선 “지향할 바를 몰라 방황할 뻔하였던 대다수 국민에게 극히 축복스러운 일”이라며 “그(박정희)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었다.
18. 1964년 11월21일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 리영희가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안건을 아시아·아프리카 외상 회의에서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가 다음날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북한이 한국과 동격으로 유엔에 초대된다는 이야기는 ‘적성국가 고무찬양’에 해당했다.
19. 1965년 9월 중앙일보 창간 당시 방우영은 삼성 회장 이병철에게 말했다. “신문 사업이란 것이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어 우리도 겨우 먹고 살기 바쁩니다. 재벌이 왜 신문에까지 손을 대려고 합니까. 그럴 돈 있으면 신문에 광고나 많이 내 신문사들을 도우십시오.”
20. 조선일보는 1968년 정부의 지급보증 특혜로 일본에서 민간차관 400만 달러를 들여와 코리아나호텔을 짓게 됐다. 조선일보는 현금 한 푼 없이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호텔을 갖게 됐다.

21. 조선일보는 1968년 12월11일 “승복 어린이가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얼굴을 찡그리자 그(공비) 중 1명이 승복군을 끌고 밖으로 나갔으며…양 손가락을 입속에 넣어 찢은 다음 돌로 내리쳐 죽였다”고 보도했다. 1968년 당시 중앙일보 기자였던 김진규 전 한국기자협회장은 “사회부 데스크였던 조선일보 최아무개 기자가 가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2. 조선일보는 1972년 10월17일 유신독재체제에 대해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란 제목의 사설에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로서 이를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었다. 
23. 조선일보는 1973년 9월7일 사설에서 “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다”며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편집인 몰래 윤전기를 세워 새 사설을 넣었던 주필은 바로 사직서를 냈다.

▲ 1975년 3월11일 6일간의 농성투쟁 끝에 남은 30여명의 기자들이 회사에서 쫓겨나자 전체 기자들이 회사 앞에 모여 조선일보 규탄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자유언론수호투쟁에 동참했던 70여명의 기자들은 그 후 굴욕적인 각서를 쓰고 회사로 복귀했다. 사진=조선투위
▲ 1975년 3월11일 6일간의 농성투쟁 끝에 남은 30여명의 기자들이 회사에서 쫓겨나자 전체 기자들이 회사 앞에 모여 조선일보 규탄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자유언론수호투쟁에 동참했던 70여명의 기자들은 그 후 굴욕적인 각서를 쓰고 회사로 복귀했다. 사진=조선투위

24. 1974년 10월24일 조선일보 기자 150여명이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했고, 경영진은 기자 2명을 해고했다. 기자들이 반발하자 경영진은 이듬해 창간기념일(3월5일) 복직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기자들은 제작거부 농성에 돌입했다. 경영진은 이 중 32명을 해고했다. 
25.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도예종 등 8명이 사형 확정 이후 하루도 안 돼 처형됐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된 이 사건에서 조선일보는 비상군법회의 관계자 말을 빌려 “도예종은 조국이 공산주의 아래 통일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고 보도했으나 훗날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26. 1975년 5월 박정희는 헌법을 유린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고, 조선일보는 5월15일 사설에서 “우리에게 가해지고 있는 잠재적 또는 현실적 위협이 우리에게 새 질서의 생활을 요구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27.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의 자서전에 따르면 박정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끔은 방일영 회장이 부러울 때가 있어. 외국 가고 싶을 때 언제나 나갈 수 있고, 놀고 싶으면 마음대로 놀 수 있고, 또 정부를 때리고 싶을 땐 마음껏 때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나도 대통령 그만둔 다음에는 신문사 사장이나 해볼까?” 
28. 1979년 10월28일 조선일보는 1면부터 7면까지 박정희 사망을 다루며 ‘민족중흥의 찬란한 금자탑 쌓고 비운에 가다’, ‘하면 된다 강력한 추진력’, ‘막걸리 즐기는 서민 풍모’, ‘용기 있고 위대한 정치가…비전 지닌 영도자’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29. 1979년 11월3일 박정희의 국장 당일 조선일보는 경어체로 사설을 쓰고 “5·16으로 ‘불행한 군인’을 자처하며 국정 책임을 한 몸에 지님으로써 ‘운명의 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인’으로 살아온 이 20년을 유구한 역사 속의 ‘운명의 시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고인이 이룩한 업적은 많고 뚜렷합니다”라며 극찬한 뒤 “박정희 대통령 각하, 고이 가십시오”라고 적었다. 
30. 전두환 신군부시절 언론인 강제해직, 언론사 통폐합, 보도지침, 언론기본법 등 독재적 언론 통제를 주도했던 허문도는 1964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동경특파원을 거친 뒤 1980년 신군부에 발탁,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과 문화공보부 차관 등을 거치며 ‘20세기 최악의 폴리널리스트’가 되었다.

31. 1980년 4월21일 사북탄광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반대와 임금 인상 등 생존권 투쟁에 나서며 경찰과 충돌했다. 계엄사가 24일부터 보도를 허용하자 조선일보는 ‘광부 3천5백명 유혈난동’이란 제목의 1면 머리기사를 내고 “폭도”, “죽음의 거리” 등 표현을 쓰며 입원 중인 경찰의 사진을 실었다. 
32. 1980년 4월10일 방우영은 “4월부터 모든 사원의 봉급을 평균 33% 인상하고, 보너스는 연 800% 이상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신군부는 그해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에 국회 기능을 맡겼는데, 당시 81명의 의원 중 방우영 사장이 포함됐다. 
33. 조선일보는 1980년 5월26일 사설 ‘악몽을 씻고 일어서자’에서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적었다. 
34. 조선일보는 1980년 8월23일 ‘인간 전두환’ 특집기사를 싣고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 “사에 앞서 공…나보다 국가 앞세워”, “자신에게 엄격하고 책임 회피 안 해”,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 “운동이면 못하는 것 없고 생도 시절엔 축구부 주장” 따위의 부제를 달았다. 전두환은 4일 뒤 단일후보로 11대 대통령이 됐다. 

▲ 1980년 8월23일자 3면
▲ 1980년 8월23일자 3면

35. 언론학자 강준만은 “1980년 언론 통폐합은 전두환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한 조선일보의 고속 성장을 가능케 했다”고 평가했다. 조선일보 매출액은 1980년 당시 161억원으로 동아일보(265억원), 한국일보(217억원)에 뒤처졌지만 5공을 거치고 난 1988년 매출액은 914억원으로 동아일보(885억원), 한국일보(713억원)를 넘어섰다. 
36. 조선·동아일보의 소위 ‘민족지 논쟁’이 벌어지던 1985년 4월17일 동아일보는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37. 조선일보는 1986년 11월17일 ‘김일성 총 맞아 피살’이란 호외를 내고 “세계적 특종”이라고 자평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18일 오전 평양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 이 신문의 “세계적 오보”를 알렸다. 

▲ 1986년 11월17일자 호외
▲ 1986년 11월17일자 호외

38. 1989년 5월15일 조선일보 노동조합은 1975년 해직된 32명 기자들의 원상회복 및 피해배상을 회사에 촉구했으나,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은 특별성명을 내고 “외부와 연결된 사내 정치투쟁”이라며 전면 거부했다.
39. 1989년 주간조선이 김대중 평민당 총재 일행의 유럽순방 당시 추태가 있었다고 왜곡 보도해 평민당이 조선일보 관계자 5명을 고소하자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한국기자협회는 “조선은 더 이상 언론자유를 운위하지 말라”고 비판했다.
40. 1991년 10월 주간조선은 국회의원 노무현의 재산이 상당하고 인권변호사 활동은 과장됐으며 고급 요트를 즐겼고 노사분규 중재 과정에서 노사 양쪽에 돈을 받았다고 보도했으며, 법원은 노무현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조선일보에 2000만 원 손해배상 판결을 냈다.

41. 1992년 10월31일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의 고희연에서 스포츠조선 사장 신동호는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 분이셨다”고 발언했다. 그해 대통령 선거 다음 날 밤 김영삼 당선인이 찾아간 곳도 방씨 일가의 흑석동 자택이었다.   
42. 1993년 조선일보 사장이 된 방상훈의 본명은 방갑중(方甲中), 해석하면 ‘갑중의 갑’이었는데 만 30세가 지난 1978년 9월 방상훈으로 개명했다. 방갑중은 군 면제를 받았다.
43. 월간조선은 1995년 9월 “한국통신 노조위원장이 여비서를 두고 그랜저를 타고 다니며 노조 간부 부인의 통장이 16개”라고 보도했으나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44. 전두환 척결 여론이 한창이던 1995년, 방우영은 조선일보 사보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협조를 부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문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참모들이 원하고 있어 고려 중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대통령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 저질 협박이었다”고 적었다.

▲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전두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내빈들이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과 함께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전두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내빈들이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과 함께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45. 방우영은 1995년 조선일보 사보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생리적으로 언론을 기피하고 혐오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며 “시종일관 언론을 회유·위협·탄압하다가 집권말기 천하의 악법인 긴급조치 9호를 발표, 영구집권을 획책하다 김재규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적었다. 
46. 조선일보는 1996년 2월13일 ‘김정일 본처 서방 탈출’을 특종 보도했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성혜림이 러시아 모스크바에 머물며 북한 측 보호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고, 당시 안기부장은 중앙일보 보도가 맞다고 밝혔다.  
47. 1996년 7월 중앙일보 지국과 조선일보 지국이 고양시에서 관할권을 두고 다투다 조선일보 직원 1명이 살해됐다. 이 사건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삼성간 지면 대결로 이어지다 전경련의 주선으로 멈췄다.
48. 1997년 월간조선이 한국외대 이장희 교수가 쓴 초등학생 대상 통일교육교재를 두고 이 교수가 북한체제를 찬양했다고 보도했으나, 서울지법은 2001년 이 교수의 명예훼손을 인정해 조선일보 등에 1억500만 원의 배상 판결을 냈다. 책 대부분은 어린이들이 실명으로 쓴 글이었다. 
49. 신한국당은 1997년 대선 당시 내부보고서를 통해 “우호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조선·중앙 양지를 1백%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적었다. 
50. 현역 국회의원 중 유일한 8선인 서청원 의원(전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다. 그는 ‘신문인 방우영’에 실은 글에서 “신문사를 떠나고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도 조선일보를 늘 친정으로 생각했고 틈나는 대로 회장님과 사장님을 찾아뵈었다”고 했다. 

51. 조선일보는 1998년 10월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이던 최장집 고려대 교수를 사상 검증한다며 그의 논문 중 일부만 발췌해 김일성을 찬양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최장집 죽이기’ 사태로 이어졌고 최 교수는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은 ‘안티조선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52.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틀 뒤인 6월17일, 16명의 기자가 방북 취재에 나섰으나 북한이 “우리를 자극하는 기사를 많이 쓰는 조선일보는 곤란하다”며 조선일보 기자만 입북을 거부했다. 이에 조선일보는 7월11일 “조선일보는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제목의 대형 사설을 냈다. 
53. 조선일보는 2001년 4월14일 사설에서 MBC ‘100분토론’ 사회자 유시민이 “신문 고시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으로써…”라고 말해 편파진행했다고 주장했으나 유시민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고, 서울지법은 조선일보에 정정보도 및 1000만 원 지급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다.
54. 노무현이 2001년 2월 “세무조사를 반대하는 언론과 싸울 수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자 조선일보는 “언론이 당장 압살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악마 같은 존재라는 망상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라고 비판한 뒤 한동안 ‘노무현’을 지면에 등장시키지 않았다. 
55. 2001년 8월17일 방상훈이 횡령 및 세금 포탈 혐의로 구속됐다. 그해 11월 초 보석 허가를 받아 석방됐다. 조선일보 주식 6만5000주를 명의신탁 형태로 아들에게 물려줘 증여세 23억5000만 원을 포탈하고, 복리후생비를 지출한 것처럼 전표를 허위로 꾸며 법인세 1억7000만 원을 포탈한 혐의 등이 인정돼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벌금 25억 원이 확정됐다.
56. 방상훈은 ‘신문인 방우영’에서 “내가 2001년 정권의 보복적인 세무조사 건으로 구속됐다가 3개월 뒤 풀려나던 날, 삼촌(방우영)은 사무실로 찾아간 나를 안으며 엉엉 우셨다”고 했다.
57. 조선일보는 2002년 2월9일 사설에서 “2001년 언론사 세무사찰은 치밀한 기획과 각본에 의해 자행된 탄압공작이었다”며 “속셈은 현 정권의 대북 정책이나 실정을 꼬집는 비판언론 길들이기”라고 주장했으며, “김대중 정권의 자유언론 탄압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 연합뉴스
▲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 연합뉴스

58. 조선일보는 2004년 1월12일 노무현 대통령이 “내가 (검찰을) 죽이려 했다면 두 번은 갈아 마실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1년 뒤 조선일보는 “확인결과 발언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정정 보도했다.
59. 2005년 10월 국회의원 유시민은 “선동 보도를 하는 조선일보는 독극물과 같다”며 “정신건강을 위해 우리 당사와 국회 원내대표실 주변에 이들 신문이 돌아다니지 않도록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60. 회삿돈 횡령 및 세금 포탈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던 방상훈은 이명박 정부 첫해였던 2008년 8·15 특별사면을 받았다. 

61. 조선일보는 2009년 4월2일 러시아 대통령이 16t이 넘는 자국산 전용차를 런던에 선보였는데 가격은 6000만 달러, 지붕은 12cm 두께의 티타늄 재질로 탱크와 충돌해도 끄떡없고 창문은 로켓포 공격을 견딜 수 있다고 보도했다. 만우절에 낚인 기사였다. 
62. 조현오 전 경기지방경찰청장은 MBC PD수첩에서 2009년 故 장자연 사건 경찰 수사 당시 “(조선일보 관계자가)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이름이 거명되지 않게 해달라고 나한테 협박을 했다”고 주장했다. 
63. 방상훈은 2009년 故 장자연 사건 당시 조선일보 회의실에서 경찰 담당 기자 2명을 배석시킨 채 소위 ‘황제 조사’를 받았다. 2개월 뒤 장자연 사건을 수사한 경기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경장이 조선일보가 수여하는 청룡봉사상을 받고 1계급 특진했다. 문재인정부는 지난해 청룡봉사상의 인사 가산점을 폐지했다. 
64. 조선일보는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서거 당일 사설에서 “새삼스레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을 떠올리며 참담한 기분을 느낀다”고 밝힌 뒤 “대한민국의 부패 특히 그 가운데서도 대통령 부패에 관한 근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만 이 불행한 일이 대한민국 역사를 새롭게 출발시키는 계기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65. 2011년 12월1일 종합편성채널 개국 첫날 TV조선은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초대해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는 표현으로 방송사에 전례 없는 정치인 극찬 방송을 내보냈다. 당시 TV조선 보도본부장 강효상은 2016년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66. 2012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집은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위치한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자택이었다. 당시 공시가격만 129억 원이었다. 
67. 조선일보는 2012년 4월20일 ‘원전강국 코리아’ 기획기사에서 “싼값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원자력발전 덕분”이며 “우리나라 원전의 안전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원자력문화재단은 이 기사에 보도 협찬금으로 5500만 원을 냈다.
68. 조선일보는 2012년 5월15일 스승의 날 서울시장 박원순이 학생들 앞에서 “학교폭력은 전적으로 선생님 잘못”이라고 말해 “스승의 날 교사들 가슴에 못을 박았다”고 보도했으나 실제 박원순의 발언은 “성인들 잘못”이었고, 조선일보는 정정 보도했다.
69. 조선일보는 2012년 7월19일 1면에서 3년 전 태풍 사진을 하루 전인 7월18일에 찍은 사진으로 보도했다. 이 사실은 동아일보를 통해 알려졌다. 
70.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는 2012년 6월 방송을 시작해 2016년 3월 진행자가 하차할 때까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41건의 제재를 받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 방송은 2013년 ‘5·18 북한군 개입설’을 여과 없이 내보내기도 했다. 

71. 조선일보는 2012년 9월1일 1면 머리기사에서 초등생 성폭행범의 얼굴을 단독 보도했으나 사진 속 주인공은 성폭행범과 아무 관련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72. 조선일보는 2012년 9월18일 지율 스님의 단식농성 등으로 터널 공사가 2년8개월만에 재개하면서 6조 원 넘는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도했으나 공사 중단 기간은 6개월이었고, 직접적인 공사 관련 손실은 145억원으로 밝혀졌다. 정정보도는 6년 뒤인 2018년 10월27일 나왔다. 

▲ 조선일보.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조선일보.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73. 조선일보는 2013년 8월29일 김정은의 연인으로 알려진 현송월이 공개 총살됐다고 보도했으나 현송월은 2018년 평창올림픽 당시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조선일보 독자권익위원회는 “현송월이 총살됐다고 오보를 냈지만 아직까지 정정 보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74. 2013년 9월 조선일보는 채동욱 검찰총장에게 혼외자식이 있다고 단독 보도했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를 지휘하던 채 총장은 낙마했다. 조선일보는 당시 보도를 두고 “권력자의 비위를 밝혀내고 잘못을 비판하는 건 언론의 기본 사명”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의 혼외자식은 4남 2녀다. 
75. 2013년 12월26일 TV조선은 ‘하루 승객 15명인 역에 역무원 17명’이란 기사를 내고 강원도 쌍룡역에 불필요하게 많은 인원이 근무하는데 그 배경이 강성노조 때문이라고 보도했으나 실제 투입 인원은 평균 5명이었다. TV조선은 철도노조가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패소했다. 
76.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홍가혜씨를 거짓말쟁이, 허언증 환자로 보도했던 디지틀조선일보는 홍씨에 대한 명예훼손이 인정돼 6000만 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77. 주간조선은 2015년 7월 “수원대가 대학구조개혁평가 결과 자격 미달 등급을 받았으며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딸인 김현경씨가 교수로 채용돼 논란이 된 바 있다”고 보도했으나 곧바로 해당 기사가 삭제되고 편집장이 교체됐다. 수원대 총장 이인수와 방상훈은 사돈 관계이며, 수원대는 TV조선 출범 당시 50억 원을 출자했다. 
78. 1991년 김기설 자살방조혐의로 3년형을 받았던 강기훈은 2015년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과거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했다고 보도했던 조선일보는 대법 판결 이후 사설에서 “모든 법관은 자신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다는 사실을 무겁게 봐야 한다”고 적었다. 
79. 한현우 조선일보 주말뉴스부장은 2015년 12월 칼럼에서 “네 명이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을 시켰는데 간장을 두 종지 줬다. 두 명 당 하나란다”라며 “다시는 안 갈 생각”이라고 적었다. 식당 주인은 미디어오늘에 “저희가 잘못한 거니까 혼나야죠”라고 말했다. 그러나 해당 중국집은 한 부장 측 ‘항의’ 이후 간장 종지를 1인당 한 개씩 줬다.
80. 조선일보는 2016년 구의역 참사 당시 “김아무개군은 사고를 당하는 순간까지 약 3분간 휴대전화로 통화를 했다”며 ‘죽음의 외주화’에 주목하던 사회 시선을 ‘노동자의 부주의’로 돌렸으나, 보도내용은 사실이 아니었고 조선일보는 정정 보도했다. 

81. 조선일보는 2016년 6월29일 “세월호 특조위가 미국 447만원, 영국 267만 원 등 비즈니스 항공권 가격을 요구했다”며 특조위가 참사 원인 규명에는 관심 없고 세금을 이용해 호화여행이나 떠날 궁리만 하고 있다는 투로 보도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조선일보는 2015년 11월7일 “세월호 특조위원장 급여가 한 달 1461만 원”이라고 보도했으나 역시 오보였다. 

▲ 조선일보.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조선일보.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82. “방상훈 사장이 조선과 TV조선에 기사 쓰지 않도록 얘기해두겠다고 했습니다.” 2016년, 발신자를 확인할 수 없는 이 문자의 수신자는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이었다. 문제의 ‘기사’는 삼성 이건희의 성매매 동영상 관련 기사였다. 조선일보는 “방 사장은 이 같은 지시를 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83.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은 2016년 10월25일 칼럼에서 “박 대통령을 감싸면 애국이고, 박 대통령을 비판하면 모두 반국가이고 친야당이란 말인가”라고 되물은 뒤 “글 쓰는 사람들에게 전에는 ‘친노’가 무서웠는데 요즘은 ‘친박’이 더 무섭다”고 적었다. 
84. 방상훈은 2017년 6월 지령 3만호 기념사에서 “일제·전쟁·독재·민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권력은 갖은 형태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했지만, 우리는 비판 정신을 내려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85. 1997년 6월 ABC협회가 발표한 조선일보 유료부수는 203만3839부였으며, 20년이 지나 2017년 6월 ABC협회가 발표한 조선일보 유료부수는 125만4297부였다. 
86. 조선일보는 2018년 7월21일 ‘노동자 대변한다면서 아내의 운전기사는 웬일인가요’라는 제목의 칼럼을 내보냈고, 이틀 뒤 칼럼 당사자였던 국회의원 노회찬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선일보는 8월11일 “사실을 오인해 고인과 유족, 독자에 상처 드린 점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운전기사는 없었다. 
87. 조선일보가 2018년 주주들에게 지급한 배당금은 105억 원이다. 방상훈(30.03%)을 비롯해 방준오, 방성훈, 방용훈 등 주주 대부분이 방씨 일가다. 
88. 73세인 방상훈은 올해(2020년)로 27년째 사장직을 맡고 있으며, 역대 조선일보 방씨 사장자(방응모-방일영-방우영) 가운데 가장 긴 재임 기간을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차기 경영권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은 방준오 조선일보 부사장은 올해 47세로, 2003년 조선일보 기자로 특채 입사했다. 
89. 조선일보는 2018년 MBC가 주진우 기자의 방송프로그램 출연료가 회당 600만 원인 것은 과도하다고 비판했으나 정작 TV조선에서 주 기자에게 회당 800만원의 출연료를 제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90. 조선일보는 2018년 5월 해리 해리스 당시 美 태평양 사령관이 “주한미군은 중국의 군사팽창을 억제하고 일본의 야욕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고 비중 있게 보도했으나 확인결과 자유한국당 대변인의 발언이었다.

91. 조선일보 노동조합은 2018년 10월1일 노보에서 “편집권 독립을 위한 장치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며 “조선일보 안에 성역은 있고 언론자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92. 조선일보는 2018년 12월11일 “한국전력이 탈(脫)원전 정책에 따른 전력 수급 불안을 막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전기수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으나 실제로는 박근혜정부에서 추진된 사업이었다. 조선일보는 박근혜 정부 시절 이 사업을 호평하는 지면을 냈다. 
93. 시사IN이 실시한 2019년 대한민국 신뢰도 조사결과에서 가장 불신하는 언론매체를 순서대로 2곳 답해달라는 질문에 조선일보가 28.5%로 1위를 기록했다. 
94.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의 2019년 상반기 ‘기사형 광고 심의 결정’ 자료에 따르면 편집기준을 위반해 독자를 기만한 기사형 광고 유포 순위에서 조선일보가 551건으로 1위를 나타냈다. 

▲ 2019년 8월27일자 TV조선 ‘보도본부 핫라인’의 한 장면
▲ 2019년 8월27일자 TV조선 ‘보도본부 핫라인’의 한 장면

95. 2019년 8월27일자 TV조선 ‘보도본부 핫라인’에서는 “조국 qm3 차량, 자택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 중”이란 자막이 뉴스 속보로 올라왔다. 
96. 2000년부터 2017까지 17년간 조선일보가 진행한 신입 공채 20건을 분석한 결과 232명의 신입 기자 중 서울대 출신이 109명으로 47%에 해당했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은 모두 81%였다. 
97. 조선일보는 2020년 1월18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처가와 넥슨 사이의 부동산 매매를 주선한 대가로 우 전 수석이 진경준의 검사장 승진 시 넥슨 주식 거래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취지의 기사는 실제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고 정정 보도했다. 보도 이후 3년 6개월 만이었다.  
98. 언론인 리영희는 과거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을 회상하며 “다른 견습기자들은 잘 가르치면 우수한 저널리스트가 되겠지만 김대중 군만은 어렵겠다고 실망했다”고 말했다. 김대중은 훗날 1980년 광주시민을 폭도로 묘사했으며, 1990년부터 30년째 조선일보 주필을 맡고 있다.  
99. 방상훈은 2005년 미디어오늘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제일 위험한 것은 사주의 이익, 권력의 이익에 의해 지면이 좌지우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100. 45년 전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소속 성한표 기자는 2019년 조선일보의 ‘반민족 친일행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내부에서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결국 전 국민의 분노 앞에 마주할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 2019년 8월1일 조선투위가 코리아나호텔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모습. 사진=언론노조
▲ 2019년 8월1일 조선투위가 코리아나호텔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모습. 사진=언론노조

※ 참고=‘한국언론사’(강준만, 인물과사상사), 민주언론시민연합 아카이브 ‘조선동아 100년 거짓보도 100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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