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요즘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아?”라는 연인의 말에 대한 대답은?

1번, “응, 요즘 피부가 좀 푸석해진 것 같아.” 2번, “아니, 더 예뻐진 것 같은데?” 물론 답은 2번이다.

‘답정너’라는 말이 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줄임말이다. 형식은 질문이지만, 답이 궁금해서 묻는 말이 아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똑같은 질문을 한다. 자신이 원래 의도했던 대답을 들을 때까지 직간접으로 압박을 가해 상대가 자신이 의도한 답을 말하게끔 하는 것을 ‘답정너’라고 칭한다.

시민이나 전문가의 코멘트를 인용해 전하는 것은 기사 작성의 기본 중 하나다. 그런데 시민이나 전문가에 묻는 인터뷰 질문은 대부분 ‘답정너’에 불과하다. 왜 그럴까? 수습기자가 자주 듣는 말이 있다. “그래서 야마가 뭔데?” 선배들은 소위 야마(기사가 의도하는 핵심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기사를 쓰도록 가르친다. 팩트와 야마를 구분해서 기사를 쓰는 것이 기사 작성의 기본이라고 가르친다. 수많은 팩트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은 좋은 기사가 아니라고 한다. 그 많은 팩트를 관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야마를 찾아서 기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 인터뷰는 물론 전문가 상대의 질문도 전문가의 식견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기자들은 누구나 특정 사안에 대해 연락할 만한 전문가 리스트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문가 리스트를 보면서 내가 설정한 야마에 맞는 말을 할 만한 전문가를 선택하고 전화를 건다.

▲ 사진=pixabay
▲ 사진=pixabay

“오늘 정부가 내놓은 OO 정책 어떻게 보십니까?”라는 기자의 말에 만약 기자가 미리 설정한 야마와 다른 대답을 하면, 이어지는 질문을 받게 된다. “이런 측면도 있는데, 그렇다면 저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요?” 내가 끝까지 내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둘 중의 하나다. 잘리든지 아니면 기계적 균형을 위한 반대 측 전문가 코멘트로 실리게 된다. 그런데 기자들의 묘한 능력은 기계적 균형을 위해 반대 측 주장을 싣더라도 야마가 희석되는 일은 없다. 마치 달콤한 과일 주스에 약간의 소금을 뿌리면 짠맛이 나기보다는 더 달게 느껴지는 마법을 구사한다.

그래서 나는 ‘답정너’의 질문을 받으면, 대답 전에 이렇게 말한다. “저의 설명이 필요하신 건가요? 아니면 멘트가 필요하신 건가요? 설명은 얼마든지 하겠지만 멘트는 불가합니다.” 기자들이 전문가에게 전화하는 목적의 대부분은 자신이 설정한 야마에 부합하는 멘트를 따기 위함이다. 전문 식견을 배우고자 연락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소수다.

전문가들은, 특히 진정한 전문가일수록 단정적 멘트를 삼간다. 저 정책은 이러저러한 장점이 있지만 저런 단점도 있으니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자에게 장단점을 동시에 말하면, 두 가지 모두가 인용하는 일은 결코 없다. 기자는 설정한 야마에 따라 장점 또는 단점 중 하나만 취사선택한다. 태양이 하나인 것처럼 야마도 하나여야만 한다. 그렇게 선배 기자에게 배워 왔다. 그래서 기자가 가장 선호하는 전문가는 기자가 설정한 야마를 확신에 찬 워딩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좋은 정책과 나쁜 정책을 일도 양단해 명확하게 표현하는 전문가는 대개 정파적인 입장에 사로잡힌 경우가 많다. 결국 정파 시각에서 모든 문제를 단순하게 표현하는 전문가일수록 언론에 자주 노출된다. 하나의 야마를 추구하는 기자와 가장 어울려서다.

이 세상에 단점 없는 팬시한 정책은 없다. 아무리 이상해 보이는 정책도 그 정책이 나올 만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 하나씩은 있다. 즉, 아무리 이상한 정책도 현실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고육책이다. 이런 상황에서 너무 명확한 야마를 추구하는 시원시원한 기사는 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특정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은 악이고, 찬성하는 세력은 선이라는 기사는 다원주의 사회에는 맞지 않는다. 언론은 아레나(Arena, 원형경기장)가 아니라 아고라(Agora, 토론 광장)가 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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