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의대 교수를 지낸 황상익은 2014년 자신의 책 ‘콜럼버스의 교환’에서 “문명 간의 교류가 전염병 교환의 통로였다”며 질병의 역사를 인류사와 연결지었다.

매독은 콜럼부스가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한 1492년 직후부터 유럽을 강타했다. 매독은 16세기초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처음 나타났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매독을 ‘프랑스 병’으로, 프랑스는 ‘이탈리아 병’ 특히 ‘나폴리 병’으로 부른다.

문명 간의 교류는 평소에도 꾸준 하지만 전쟁을 통해 가장 격렬하게 소통된다. 질병은 지리적 공간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부산물이다.

여기에 더해 인간 서식지가 늘어나면서 주거지를 인간에게 뺏긴 동물들은 많은 전염병을 인간에게 선물해 보복했다. 에이즈는 아프리카 밀림의 원숭이로부터 인간에게 옮겨왔고, 높은 치사율로 세계를 벌벌 떨게 한 에볼라도 그렇다. 아프리카 밀림을 눈앞의 이득 때문에 막무가내로 개간하면서 생긴 병들이다. 지금 창궐하는 코로나19도 동물이 인간에 준 보복이다.

중세는 전염병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347년 처음 흑사병이 유행한 뒤부터 4세기 동안 전 유럽은 인구 정체기였다. 일손 부족은 식량 부족으로 이어져 1690~1700년 프랑스에서만 수백만명이 죽었다. 중국도 1654~1676년 사이 혹독한 겨울을 겪었다. 1816년엔 미국에서 중동, 북아프리카까지 흉작과 발진티푸스가 만연했고 흑사병이 다시 도졌다.

▲ 1411년 토겐부르크 성서에 그려진 흑사병 환자. 사진=위키백과
▲ 1411년 토겐부르크 성서에 그려진 흑사병 환자. 사진=위키백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은 지구의 최강자로 등극했지만 유럽엔 19세에도 전염병에 의한 굶주림이 덮쳤다. 1832년 프랑스엔 콜레라가 창궐해 파리에서만 1만8402명이 죽었다. 막대한 피해는 주로 노동자 밀집구역에서 일어났다.

빈민에게 번진 전염병이 부자에게 옮겨오는 것에 질색한 나폴레옹 3세는 1853년 오스만 남작을 파리시 지사에 임명하고, 1870년까지 17년동안 파리의 도시정비를 주도하면서 지금의 파리를 완성했다. 오스만의 파리 정비는 부자에게 이중의 공포였던 전염병과 도시폭동 예방이 주목적이었다. 바리케이드를 쉽게 못 치도록 하고 군대 진입을 원활히 할 대로 건설과 교통망 정비, 위생설비 확충에 치중했다. 도심 내 노동자 밀집주거지는 대로와 공공건물 건설을 이유로 철거됐다. 투기와 땅값도 대폭 뛰었다. 상하수도 설비는 파리 서쪽 부자 동네에 집중됐고, 노동자는 도심에서 쫓겨나 주변부로 흩어졌다. 오스만의 작업으로 1870년대 파리는 부유한 도심과 서쪽, 가난한 동쪽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이중도시가 됐다.

전염병은 우리 역사에도 격동의 출발점이었다. 정조를 이어 어린 순조가 왕이 된지 11년째인 1811년 조선은 외척의 세도로 문란해졌고 지방관의 수탈로 백성은 고통받았다. 10년을 치밀하게 준비한 홍경래가 1811년 12월 평안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평안도엔 흉년과 전염병이 겹쳐 백성들이 유리걸식했다. 일제가 아니었다면 홍경래와 진주민란은 이 땅에 근대의 문을 여는 사건으로 기록됐을 거다.

1911년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영친왕 이은도 숨진 어머니는커녕 아버지 고종도 만날 수 없었다. 엄비가 전염병인 장티푸스로 죽어 전염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우리도 전염병으로 근대의 문을 열었다.

1920년 콜레라가 서울을 강타해 공식 집계된 조선인 사망자만 983명이었다. 식민지 당국은 1920년대 초반 조선의 물 문화는 자연수에서 상수도로 전환했다. 1924년 봄 경성부가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받는 수도 계량제를 도입했다.

당국이 아무리 상수도를 개설해도 일제시기 전체에 걸쳐 조선인 대부분은 여전히 돈을 내지 않는 우물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상수도 중심의 물 대책은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누리던 물을 중심으로 계층화를 만들어내고 자연수를 하급수로 전락시켜 서민들의 물 권리를 박탈했다. 이 시기 진정 필요했던 물 정책은 상수도 확대가 아니라 자연수의 관리와 보존이었다.

콜레라 직격탄을 맞은 서울 서민들은 1920년대 땅을 파고 짚 가마니로 지붕을 덮은 토막을 짓고 살았다. 토막은 지금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훈련원공원이 있는 청계천변 저지대에 몰렸다. 토막에 사는 서울시민은 1928년 1143가구 4802명에서, 1931년엔 1538가구 5098명에 달했다.

이들은 토막 집에서도 마음 놓고 살 수 없었다. 식민지 당국은 수시로 토막 집을 무허가 건물도 단속해 철거하기 일쑤였다.

일제가 물러나고도 마찬가지였다. 전염병은 늘 강제철거된 서민들 뒤를 집요하게 따라왔다. 1969년 5월부터 서울 도심개발에서 밀려난 철거민 10만1325명이 트럭에 실려 경기도 광주로 쫓겨왔다. 정부는 이들에게 임시 천막을 배정했다. 이듬해 봄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쫓겨나고 전염병에 시달린 철거민들은 1970년 8월10일 들고 일어났다. ‘광주 대단지’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 지난 2월24일 오전 경북 청도 대남병원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해 환자를 이송하기 위한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2월24일 오전 경북 청도 대남병원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해 환자를 이송하기 위한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청도 대남병원 5층 정신병동 입원환자 105명 중 103명이 코로나19에 집단 감염됐다. 뒤늦게 언론은 “정신장애인이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반 마련은 미룬 채 적은 비용으로 병원에 격리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고 보도했지만 늦었다. 대남병원 첫 사망자는 10대 발병해 평생을 정신병동에 입원했다가 숨졌다. 가난을 방치한채로 전염병만 잡으려는 건 허사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