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2월24일. 오후 4시 현재 코로나19 확진환자는 833명이며 사망자는 7명에 이르렀다. 현재 검사가 진행 중인 유증상자만 해도 1만1631명에 달한다. 정부가 위기 경보를 가장 높은 수준인 ‘심각’ 단계로 올렸지만 시민들은 아침마다 확인하는 확진환자의 숫자만으로도 이미 심각의 상태를 넘어섰다.

예상할 수 없었던 확진환자 수의 증가는 연령, 지역, 직업, 소득 수준 등을 가리지 않고 전파되는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무차별성을 보여준다. 감염증이 두려운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는 두려움과 불안이 공동체를 각자도생해야 할 고립된 개인의 집합으로 만든다. 

문제는 바이러스의 무차별성이 확진환자와 사망자를 나타내는 숫자와 결합할 때다. 883이나 1만1631이라는 숫자는 그것이 가리키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나 계층을 보여주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감염자를 가리지 않듯 숫자는 감염자가 누구인지를 구분짓지 않는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무차별적이고 그것의 두려움을 고조시키는 숫자 또한 무차별적이라도 사람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과 고통은 보편적이지만 그 무게와 강도는 사람마다 결코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 2월25일 오전 10시12분 현재 연합뉴스TV는 코로나19 확진자와 완치된 사람, 검사중인 사람 현황을 오른쪽 위에 표시했다. 사진=연합뉴스TV 유튜브 갈무리
▲ 2월25일 오전 10시12분 현재 연합뉴스TV는 코로나19 확진자와 완치된 사람, 검사중인 사람 현황을 오른쪽 위에 표시했다. 사진=연합뉴스TV 유튜브 갈무리

숫자로 표시되는 코로나19 확진환자를 어떻게 구분짓는지는 그 사회의 인권 수준을 보여주기도 한다. 코로나19 관련 정부 발표와 언론 보도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구분은 행정구역에 따른 지역이다. 촌각을 다투는 대응에서는 공공기관이 주체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구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숫자를 국적, 인종, 종교로 구분할 때 평온한 일상에서 잠재해 있던 차별과 혐오가 작동한다. 

하지만 차별과 혐오보다 더 강력한 바이러스의 영향력은 숫자와 관행적인 구분 너머에서 벌어진다. 현재 113명의 확진환자와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곳은 청도대남병원이라고 부르지만 이들을 정신병원의 폐쇄병동에 고립되어 소외된 정신장애인들로 본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수 많은 병원 중 한 곳이 아니라 ‘정상인’의 사회에서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또는 보고 싶지 않던 사람들을 은폐했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신체적 고통만으로 바이러스의 영향력을 한정할 수는 없다. 지금 한국 사회에 코로나19가 미치는 재난은 더 많은 소외와 불평등을 드러내고 있다. 개강 연기로 급여 지급이 지연된 대학의 시간강사, 미뤄진 개학으로 아이들의 돌봄을 걱정해야 할 맞벌이 부부, 200만원도 되지 않는 매출조차 폭락하여 2월의 임대료와 대출 이자에 막막한 자영업자, 폐쇄된 복지관 앞에서 쪽방으로 돌아가 불안에 떨어야 하는 독거 노인, 갑자기 중단된 공공급식으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노숙자, 자신의 증상마저 제대로 설명할 수도 밝힐 수도 없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은 차별과 혐오의 구분에 조차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 2월24일 현재 14명의 코로나19 환자가 격리 치료를 받고 있는 국립중앙의료원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의심환자와 정확한 조사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2월24일 현재 14명의 코로나19 환자가 격리 치료를 받고 있는 국립중앙의료원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의심환자와 정확한 조사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코로나19의 확진환자와 사망자의 숫자에서 볼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감염증 확산이라는 긴급사태에서 드러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심각한 중병에 걸린 사람이 가장 먼저 증상을 보이는 곳은 평소 가장 취약했던 신체의 일부라고 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이전에도 그랬듯 여전히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 이들에 대한 구분조차 숫자로만 환원하려는 그 무차별함이 특정 지역과 종교를 향한 차별과 비난보다 더 두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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