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재학 PD가 CJB청주방송과 노동자성 인정을 두고 다투다 패소하기 앞서, 청주방송 AD와 작가 등 이른바 ‘프리랜서’ 스태프들은 수년 전부터 사법‧행정기관에 거듭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재학 PD 사건 재판부가 거듭된 판례를 두고 이 PD에 대해서만 다른 판단을 했다.

고용노동부 소속 노동위원회와 법원은 앞서 청주방송 AD(조연출) 과로사 사건과 라디오 작가 부당해고 사건 등에서 스태프들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했다. 각 판단을 보면 이들은 이 PD와 마찬가지로 △정규직과 협업이 불가피한 일을 했고 △청주방송에만 적을 두고 일했으며 △청주방송이 근무시간과 장소를 사실상 통제하고 △청주방송이 작업도구를 제공했다. 해당 노동위와 법원이 이런 ‘실질적 종속성’ 요소를 따진 것과 달리 이 PD 사건 재판부는 판단에 반영하지 않았다.

서울행정법원 제13부(반정우 재판장)는 2013년 10월 조연출 고 A씨에 대해 “망인은 임금을 목적으로 한 종속 관계에서 이 사건 회사(청주방송)에 근로를 제공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근로기준법에 따른 근로자”라며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이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A씨는 2011년부터 청주방송에서 일하다 이듬해 과로와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해 심인성 쇼크로 숨졌다. A씨 유족은 행정소송 끝에 산재를 인정받았다.

A씨는 조연출로 PD 보조와 편집업무를 했다. A씨는 매주 수요일 방영되는 ‘시장에 가자’ 프로그램을 조연출했는데, 주간 업무 일정과 시간‧장소가 이를 중심으로 짜였고 그는 담당 PD 지시를 받았다. 회사 지시로 다른 정기‧특집 프로그램도 조연출했다. 따로 계약을 맺지 않은 채다. A씨의 산재 신청을 도운 노무법인으로부터 받은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A씨가 노동자란 핵심 근거로 “구체적인 업무 내용은 프로그램 담당 연출자에 의해 결정돼 그의 지시·감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고 이재학 PD 빈소 사진. 사진=손가영 기자
▲고 이재학 PD 빈소 사진. 사진=손가영 기자

충북지방노동위도 2017년 근로계약 없이 일한 라디오 작가 B씨가 법적 노동자라고 판정했다. 충북지노위는 “실질은 이 사건 근로자(B씨)와 사용자(청주방송) 간 종속성이 인정”된다며 “(B씨가) 사용종속관계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고 밝혔다. B씨는 2014년부터 청주방송에서 일하다 2017년 팀장의 조기출근 지시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구두 해고됐다. 그는 노동위에 부당해고 구제신청했다. 청주방송 내 관계자에 따르면 그는 복직한 뒤 충주로 발령받고 퇴사했다.

B씨는 막내 작가로 라디오프로그램 진행지원과 녹음편집에 더해 회사 지시에 따른 행정업무도 했다. 고용노동부가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판정서를 보면, 충북지노위는 “사용자(청주방송)는 업무내용을 정하고, 상당한 지휘감독을 했다”는 점을 핵심 근거로 들었다. 지노위는 또 “이 사건 근로자(B씨)가 프로그램관리 업무 외에도 부서 내 행정업무 등을 병행하고, 프로그램 수 변동이 있더라도 보수 자체에 변동이 없었던 점”도 인정 요소로 봤다.

A씨와 B씨 모두 형식상 프리랜서로 취업규칙과 4대보험을 적용받지 않았고 근로소득세를 내지 않았다. 각 심판위와 재판부는 사용자가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이들 징표를 근거로 노동자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A씨 하던 프로에서 같은 업무, B씨처럼 사측 지시로 행정일 일상

이 PD 업무 양태도 A‧B씨가 노동자성을 인정 받은 지점들에 폭넓게 들어맞는다.

이 PD는 청주방송 지시와 통제를 받고 14년 일했다. 이 PD는 2004년 입사해 A씨처럼 조연출을 맡았다. 특히 2012~2013년엔 A씨와 똑같이 ‘시장에 가자’를 조연출했다. 2011년부터는 PD로 프로그램 기획‧촬영‧디렉팅‧편집을 책임졌다. 국장에게 매일 업무보고했고, 밖에서는 청주방송 PD라 불렸다.

이 PD는 B씨처럼 회사 지시와 보고를 주고받으며 행정업무도 했다. 일주일에 5~7일 출근했고 2~3일은 밤을 샜다. 아침 8시30분 이전부터 저녁 7시 이후까지 일했다. 그렇게 해고 전 3년만 쳐도 21개 TV프로그램을 소화했다.

▲이재학 PD가 연출·조연출한 CJB청주방송 프로그램들의 방영분 갈무리. ‘CJB 청주방송 이재학 PD 사망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명예회복,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 제공
▲이재학 PD가 연출·조연출한 CJB청주방송 프로그램들의 방영분 갈무리. ‘CJB 청주방송 이재학 PD 사망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명예회복,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 제공
▲고 이재학 PD가 ‘박달가요제’ 촬영차 청주방송 측에 출장 승인 받기 위해 작성한 취재진 출장신청서. ‘청주방송 고 이재학PD 대책위’ 제공
▲고 이재학 PD가 ‘박달가요제’ 촬영차 청주방송 측에 출장 승인 받기 위해 작성한 취재진 출장신청서. ‘청주방송 고 이재학PD 대책위’ 제공

그러나 청주지법 민사6단독 정선오 판사는 지난달 22일 이 PD의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그에게 패소 선고했다. 판결문을 보면 정선오 판사는 이 PD의 일과 등 구체적 업무 양태는 언급하지 않았다. 정 판사는 ‘이 PD는 AD로 오래 일했는데 AD는 정규직원이 아닌 프리랜서가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노동자성 부정 근거로 제시했다. 이 PD가 B씨처럼 회사 지시에 따라 행정 사무까지 맡은 데에는 ‘사측의 지휘 감독을 일부 받았지만 제작에 필요한 부수 업무’라고 밝혔다. 

이 PD의 사건을 대리한 이용우 변호사(법무법인 창조)는 “이 PD 사건 판결에서 재판부는 사실 인정 부분부터 부실했다. 그 탓에 정규직과 협업, 청주방송 전속 등 사측 지휘·감독 판단은 추상적으로 하면서, 취업규칙·4대보험 등 부차적 형식 요소를 중시했다. 심지어 이 PD가 A씨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같은 업무를 했는데도 노동자성을 부정한 건 앞서 두 판단과 비교되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 PD는 지난달 30일 항소한 뒤 “하루 하루가 너무 힘들다.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들 알고 있지 않을까?” 등 내용이 담긴 유서를 쓰고 지난 4일 숨졌다.

청주방송 측은 “A씨와 B씨의 노동자성은 인정한다”면서도 “법원의 이번 판결은 양측이 서로 근거와 법리로 다퉈 나온 결론이다. 회사가 아니라 판사에게 판단을 맡길 부분”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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