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고 이재학(38) PD가 받아든 근로자지위소송 판결문은 그가 ‘CJB청주방송 사람으로, 청주방송 지시에 따라’ 일했다는 56개 증거를 배척했다. 판사는 이 PD가 회사 안팎에서 PD라 불리며 정규직과 같은 일을 했는데 “오랫동안 프리랜서 AD로 일했다”며 간과했다. 정규직도 안 하는 보조금·연출계약 업무를 회사 지시에 따라 맡은 점은 “부수적 업무”로 일축했다. 이 PD 동료들 진술서는 “신빙성 인정이 어렵다”면서도, 사측의 진술서 제출을 둘러싼 직원 압박 정황은 살피지 않았다.

청주지법 민사6단독 정선오 판사는 이 PD에 패소 판결했다. 방송노동 현장은 물론 노사관계를 이해 못한 데서 나온 판단이란 지적이다. 업무상 지휘·감독 여부를 종합적으로 따지는 판례 흐름을 거스른 결과란 비판도 나온다.

“AD 오래했기에 프리랜서” 업무종속은 외면

청주지법 민사6단독 정선오 판사는 이 PD가 청주방송에 종속된 노동자인지 판단하며 “CP나 PD는 방송국의 정규직원이 담당하는 것 일반적이나, AD는 정규직원이 아닌 프리랜서가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고(이 PD)는 (…) 프리랜서인 AD로 피고 회사의 프로그램 제작에 관여하기 시작해 오랫동안 AD로 일했다”고 했다. 정 판사는 그가 ‘다른 프리랜서처럼 △특정 시간·장소 출퇴근 의무가 없었고 △회사가 근태관리하거나 징계 등 불이익을 주지 않았고 △휴가 등에 취업규칙 적용을 받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 PD가 오랫동안 조연출(AD) 프리랜서로, 다른 프리랜서처럼 일했으니 노동자가 아니라는 얘긴데, 해당 업무의 실질은 아예 가리지 않았다.

▲고 이재학 PD 유족대표 이대로씨는 12일 서울 국회에서 열린 유족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사건 진상조사와 이 PD 명예회복‧가해자 처벌, 언론계 노동행태 개선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사진=김용욱 기자.
▲고 이재학 PD 유족대표 이대로씨는 12일 서울 국회에서 열린 유족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사건 진상조사와 이 PD 명예회복‧가해자 처벌, 언론계 노동행태 개선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사진=김용욱 기자.

이 PD를 대리한 이용우 변호사는 재판부 판단에 “AD든 PD든, 방송계에 난무하는 ‘프리랜서’의 실질이 노동자인지 가리는 소송인데 재판부는 쟁점을 외면했다”고 했다. AD 일은 방송 현장에서 누구보다도 윗선의 지휘·감독에 좌우된다. 김유경 노무사(돌꽃 노동법률사무소)는 “AD야말로 수많은 방송스태프 업종 가운데 종속성이 100%다. 사용자 지시를 따라 출퇴근하고, 잡일 등 모든 일을 한다. 독립으로 일할 여지는 없다”고 말했다. 방송스태프가 현장에 종속된 노동자인데도 형식상 개인사업자로 일하는 실태가 지적 받아온 지 오래다.

회사는 이 PD 출퇴근을 실제 통제했다. 이 PD는 1주일에 5~7일 출근했다. 내근 땐 매일 아침 8시30분 전에 출근해 저녁 7시 이후 퇴근했다. 근무시간은 회의와 준비, 촬영, 편집, 송출까지 청주방송 방영 일정에 맞춰졌다. 사무는 청주방송 안에서 봤고, 야외 업무는 청주방송 결재를 거쳤다. 취업규칙 등 징계규정은 대법원 2006년 판결 이후 노동자성 판단에서 부차 징표로 보는 추세다. 사측이 임의로 결정할 부분이라서다.

정규직 일 했는데 무언급, 회사지시 일상엔 ‘부수적’

이 PD는 일일·주간 정규 방송프로그램은 물론 각종 특집방송에 참여해 동시에 연출과 조연출 업무를 맡았다. 해고 직전엔 ‘TV여행 아름다운 충북’과 ‘박달가요제’를 연출했다. 청주방송 한 정규직 PD에 따르면 그는 정규직보다 2배 가까이 많은 프로그램을 소화했다. 여기에 더해 정규직 PD는 하지 않는 행정사무도 했다. 프로그램 제작에 쓸 지자체 보조금을 따려 기안과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지자체와 협의하거나 비용 정산도 했다. 회사에 보고와 지시를 주고 받으면서다. 그러나 판결문엔 이런 업무 양태를 따지는 대목은 없다.

정선오 판사는 이 PD의 연출·조연출 업무에 “프로그램에 종료되면 더 이상 출근 의무가 없었다”, “촬영에 참가한 횟수에 따른 보수를 지급받았다”는 점을 들어 노동자가 아니라고 봤다. 이 PD의 실제 업무와 상충한다. 이 PD는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에 맡아 연속적으로 일했고, 프로그램 방영과 무관하게 급여를 받았다. 정 판사는 이 PD의 대외업무를 놓고 “참여 프로그램에 한해, 그 제작에 필요한 부수업무 내의 것으로 보일 뿐”이라고도 했는데 실상과 다르다. 도급 계약은 주어진 일감을 맡기는 건데, 이 PD는 외려 회사 지휘에 따라 일감 성사(보조금 따내기) 업무까지 맡았다.

▲고 이재학 PD 측이 법원에 제출한 증거 가운데 하나로, 이 PD가  ‘청주방송 지방보조금 실무책임자’로 청렴서약서까지 작성한 내부 문서. 그래픽=이우림 기자
▲고 이재학 PD 측이 법원에 제출한 증거 가운데 하나로, 이 PD가 ‘청주방송 지방보조금 실무책임자’로 청렴서약서까지 작성한 내부 문서. 그래픽=이우림 기자

동료·사측 진술서에 판단 달라, 증거제출 거부 묵인

이 PD가 제출한 56개 증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동료들 진술서였다. 진술서에는 ‘이 PD가 정규직과 똑같이 회사 지시에 따라 상시로 일했고, 회사 안팎에서도 모두 그를 (정규직)PD로 부르고 대우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 판사는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한 바가 없어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반면 증언에 나서지 않은 사측 간부들 진술서의 신빙성은 인정했다.

재판에서 청주방송이 이 PD 측 진술서를 쓴 동료를 압박해 거두게 한 정황도 살피지 않았다. 진술서를 낸 이 PD의 동료 3명 가운데 1명은 회사의 거듭된 지시에 결국 진술서 내용을 번복하는 취지의 경위서를 썼다. 청주방송은 그가 작성한 진술취소 ‘사실관계확인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그러나 판사는 진술 번복과 조작 정황을 살피지 않았다. 이재학 PD의 동생 이대로씨는 “형은 청주방송의 위증과 증거 조작에 더해, 판사가 그렇게 만들어진 사측의 자료만 받아들여 판결한 점을 제일 억울해 했다”고 말했다.

정 판사는 회사가 이 PD 노동자성과 관련한 결정적 자료의 제출 거부도 묻지 않고 지나쳤다. 청주방송이 2017년 노무법인에 의뢰해 이 PD를 비롯한 프리랜서 근무실태를 조사한 검토의견서로, 이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는 이 PD 측의 자료제출 요구에 ‘없다’고 주장했고, 정 판사는 더 묻지 않았다.

▲고 이재학 PD의 동료가 작성해 법원에 제출된 진술서 일부. 이 PD가 모든 업무를 사측 보고와 지시, 결재와 승인을 거쳐 수행했다는 등 PD 업무의 노동자성을 긍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 이재학 PD의 동료가 작성해 법원에 제출된 진술서 일부. 이 PD가 모든 업무를 사측 보고와 지시, 결재와 승인을 거쳐 수행했다는 등 PD 업무의 노동자성을 긍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용우 변호사는 이 판결을 놓고 “법원이 노동자성을 판단할 땐 업무 관련 사실관계를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독립·종속성을 가려내야 한다. 이번 재판부는 업무 내용 자체를 따지지 않고 출발한 뒤, 현장과 법리에 대한 오해를 종합해 엉뚱한 결론을 냈다. 판결문에서 노동자 측의 방대한 증거를 검토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항소한 이 PD는 지난 4일 유서에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라고 적었다.

청주방송 관계자는 미디어오늘에 “회사는 법원의 판단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일부 혹은 전부 패소했어도 겸허히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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