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개혁위원회는 2017년 10월 이명박정부 국가정보원이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다는 내용의 진상조사 결과를 내놨다. ‘문예계 주요 左성향 인물 현황’이란 문건에는 ‘봉준호-민노당 당원’이 적혀 있었다. 봉준호 감독은 그해 프랑스 AFP통신과 인터뷰에서 자신의 ‘블랙리스트’ 경험을 두고 “대단히 악몽 같은 기간이었다. 한국 예술가들이 블랙리스트 때문에 깊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지난해 5월 ‘기생충’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자, AFP는 그가 블랙리스트였다고 보도했다. 

봉 감독은 2017년 6월 JTBC ‘뉴스룸’과 인터뷰에서 2016년 10월24일 ‘뉴스룸’을 언급하며 “그 방송을 라이브로 봤는데, 짜릿한 순간이었습니다”라며 블랙리스트 피해자로서 국정농단 사태를 바라본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11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 등 4관왕 쾌거를 전하며 “몇 년 전만 해도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던 인물의 굉장한 반전”이라고 보도했다. 가디언은 “봉 감독을 포함해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 9473명 대부분은 2014년 세월호 참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정부를 비판했고 이로 인해 정부 기금에서 배제됐다”고 보도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 또한 10일(현지시간) “블랙리스트가 계속됐더라면 기생충은 오늘날 빛을 보지 못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JTBC 보도화면 갈무리.
▲JTBC 보도화면 갈무리.

정작 11일자 주요 종합일간지를 비롯해 한국언론의 보도에선 봉 감독의 ‘블랙리스트’가 주요하게 언급되지 않는 모습이다. ‘블랙리스트’ 주범으로 지목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구속되고 재판으로 넘겨진 뒤 언론의 관심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해 특정 문화·예술인을 마치 ‘기생충’처럼 취급·분류해 차별·배제했던 블랙리스트 사태는 2016년 말 당시 떠들썩했던 언론 보도와 달리 △책임자 처벌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 등 주요한 후속 조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출범했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진상조사위)는 실질적 조사권 부재와 주요 자료 확보의 어려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적극적인 조사 방해로 12개월의 활동기간 동안 여러 한계에 부딪혔다. 예술인 지위 보장에 대한 법안은 국회에 표류하고 있다. 블랙리스트 민사소송에 참여한 일부 문화예술인들이 1심에서 승소했지만 문화체육관광부가 항소하며 법적 판단도 기약없이 길어지고 있다. 

▲

정윤희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공동운영위원장(미술작가)은 11일 통화에서 “책임 있는 공무원들의 경우 대부분 징계시효가 만료되어 징계를 받지 않았고, 기소된 일부 공무원은 지금까지 기소 유예 상황이다. 김기춘·조윤선의 판결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 때문인데, 대법원은 이들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와 관련해 추가 심리하라며 고법으로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고 전했다. 그는 입법·사법·행정부가 각자 책임을 미루고 있다며 “해결을 위한 그 어떤 것도 안 되고 있다. 기억 전쟁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28일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등은 기자회견을 열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시행에 있어 실질적 역할을 했던 박근혜정부 시절 송수근 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계원예술대학 총장에 임명됐다”며 임명을 승인한 교육부에 승인 철회를 요구했다. 이어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2차 가해에 대한 청와대의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했다. 

송경동 시인은 11일자 한겨레 기고를 통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8년 11월6일 현장문화예술인과 함께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및 문화행정 혁신을 위한 TF’를 꾸리기로 합의한 내용을 지키기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도 미진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요구 등에 답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11일자 1면에서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정복’에 환호했던 언론이라면 한 때 그를 비롯한 예술인들을 ‘기생충’ 취급했던 블랙리스트 사태의 후속 조치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