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화해 무드는 이미 1971년 10월28일 유엔에서 중국 가입과 대만 축출안이 76대 35로 통과되면서 예견됐다. 그날 밤 유엔에서 미국이 7번 표결에서 6번 패배하면서 냉전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날 유엔 총회장엔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지만 한국의 김용식 외무장관은 자꾸만 ‘큰일났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세계 정세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 

조선일보 베트남전 종군기자와 한국일보 편집국장에, 민주당 4선 의원까지 지낸 고 조세형씨는 기자 시절 미국 워싱턴 특파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기자 조세형은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무려 6년간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다.

▲ 고(故) 조세형 기자
▲ 고(故) 조세형 기자

그가 워싱턴 특파원 때는 탈냉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핑퐁 외교 끝에 닉슨 대통령은 1972년 2월 중국으로 날아가 저우언라이 중국 수상과 정상회담을 했다. 최고 실력자 마오쩌둥이 살아 있었지만 노쇠해 실질적인 회담은 두 사람이 도맡아 결정했다. 이 회동은 한반도 정세에도 매우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닉슨의 미국은 상호불가침과 호혜 평등, 평화 공존 등을 담은 중국의 ‘평화 5원칙’을 받아들였고, 대만에서 미군과 군사시설 철수도 확약했다.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하는 회담인데도 한국 기자는 베이징에 발조차 들일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은 북한을 물론이고 중국과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와 수교는커녕 입국 자체도 힘들었다. 우리는 중국을 ‘중공’이라고 부를 만큼 폐쇄적이었다. 당시 한국 언론은 한반도의 미래를 좌우할만큼 중요한 미중 정상회담인데도 대부분 AP나 로이터 같은 외신을 인용해 지면을 채워야 했다. 

조세형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도 닉슨 대통령을 따라 북경에 갈 수 없었다. 국가보안법이 버티는 한국에선 제 아무리 기자라도 적성국가에 들어갈 수 없었다. 기자가 현장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조 기자는 머리를 썼다. 잘 알고 지내던 시카고 트리뷴의 미 국무성 출입기자 일도 베크만 기자에게 전화 취재를 부탁했다. 조 기자는 미중 회담에 맞춰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조 기자는 닉슨을 따라 북경에 가 있는 베크만 기자와 매일 통화해 현지 상황을 간접취재해 지면을 채웠다. 

조세형 기자는 1974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포드와 브레지네프의 미소 정상회담 때도 같은 방식으로 간접 취재해 한국일보 지면을 채웠다. 비록 간접취재였지만 당시 조 기자는 최선을 다했다. 뻔한 현장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나무만 보는 취재가 능사는 아니다. 

반대로 언론은 현장에 갈 수 있는데도 자제해야 할 때도 있다. 2014년 10월 캐나다 국회의사당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났을 때 캐나다 공영방송 CBC가 보여준 생방송 특보가 그랬다. 

베테랑 앵커 피터 맨스브리지(Peter Mansbridge)가 스튜디오를 지킨 이날 CBC의 방송은 차분했다. 이웃나라인데도 더 호들갑 떨었던 미국 언론과 사뭇 달랐다. 들어오는 소식을 무턱대고 전하지 않고 일일이 확인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박진감 넘치는 배경음악이나 자극적 자막도 없었다. 숨 넘어가는 목소리 대신 신중하고 사려 깊었다. 자극적인 영상을 피하려고 카메라는 시종일관 멀리서 잡았다. 

▲ 2014년 10월22일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서 발생한 국회의사당 총격 사건을 보도하는 CBC 뉴스 갈무리.
▲ 2014년 10월22일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서 발생한 국회의사당 총격 사건을 보도하는 CBC 뉴스 갈무리.

이 때문에 CBC는 국회 경비직원의 사망 소식을 다른 매체보다 늦게 전했다. 낙종을 하고도 CBC는 어떻게 이 소식을 접했고 정확한 정보라고 믿게 됐는지 조심스럽게 설명해 나갔다. 요즘 ‘신종 코로나’ 보도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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