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를 국어와 동등한 언어로 명시한 한국수화언어법(한국수어법)이 3일 제정 4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정작 농인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 관련 정부 발표에서 배제됐다. 장애인단체는 정부에 수어통역 제공 등 정책 개선과 함께 공공기관의 수어정보 의무지원을 제도화하라고 요구했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장애벽허물기)’는 4일 국가인권위원회에 국무총리실과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를 상대로 신종 코로나 관련 브리핑과 기본정보에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며 차별을 진정했다. 이들은 이들 부처에 신종 코로나 관련 브리핑 등 영상에 수어통역을 제공하고 수어동영상을 만들어 게시하도록 촉구했다.

정부와 보건당국이 연일 신종 코로나 확산과 대응책을 새로 발표하고 관련 정보와 뉴스도 넘쳐나지만, 수어 사용자를 위한 정보는 많지 않다. 정부가 신종 코로나 관련 브리핑과 안내 동영상 등에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는 탓이다. 질병관리본부가 따로 마련한 감염현황 홈페이지도 수어 사용자를 위한 안내를 배치하지 않았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2일 신종 코로나 확대 중앙사고수습본부 회의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현장이나 영상 수어통역은 제공하지 않았다. 보건복지부 홈페이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2일 신종 코로나 확대 중앙사고수습본부 회의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현장이나 영상 수어통역은 제공하지 않았다. 장애벽허물기 제공
▲글자 위주로 구성된 질병관리본부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현황 페이지.
▲글자 위주로 구성된 질병관리본부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현황 페이지.

김철환 장애벽허물기 활동가는 “마스크 착용이나 손씻기 당부 같은 기본 정보는 이미지로 배포해 농인도 알기 쉽다. 문제는 당국이 날마다 확진자 발표나 입국자 금지 조치 등 새 정보를 업데이트하는데, 현장이나 이후 영상에서도 수어통역이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김 활동가는 “정부가 국민들의 불안감을 씻으려 브리핑을 하는데, 농인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다 보니 시시각각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불안하다. 하다못해 극장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혼란스런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했다.

일각에선 ‘활자 정보로 충분하지 않냐’고 물을 수 있지만 모르는 얘기다. 어릴 때부터 수어가 익숙한 농인은 입말을 쓰는 이에 비해 줄글 파악이 상대적으로 어렵다. 수어와 줄글 문장 사이 언어체계가 달라서다. 김 활동가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모방으로 언어를 배운다. 농인은 수어를 제1언어로 접하고, 수어에는 조사가 없는 등 활자와 전혀 달라 마치 서로 외국어 같다. 수어를 기본언어로 쓰는 이들은 줄글에서 단어 하나하나는 감지해도 문장이 주욱 이어지면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말 부처 정례 브리핑과 국무회의 결과 등 정부 발표와 재난 현장, 국경일, 정부 기념일 행사 등에 수어통역을 제공한다고 밝혔지만 정작 감염병 위기경보 ‘경계’ 상황에선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달 27일 오전 서울 수서역 전광판에 바이러스 예방 관련 정보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7일 오전 서울 수서역 전광판에 바이러스 예방 관련 정보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장애벽허물기와 동서울서울자립생활센터 등 장애인단체는 이날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공문서 등 공공정보의 수어정보 제공 △농교육 전면 개선 △청와대 브리핑 현장에 수어통역 배치 등 농인 관련 복지정책 개선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한국수어법이 “모든 생활영역에서 한국수어를 통하여 삶을 영위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하지만 공공기관의 수어 제공 등 정부의 권리보장 의무를 구체화하지 않아 선언에 그친다고도 지적했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은 20~21조에 공공기관 등이 장애인의 정보접근에 차별행위를 해선 안 되고 의사소통 편의제공을 해야 한다고 명시했지만 포괄조항에 그치거나 당사자 요청을 전제로 한다. 공공기관의 사전 지원의무를 명시한 법개정안은 보건복지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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