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지법 순천지원은 20일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재심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 고 장환봉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뒤 고개 숙여 사과했다. 판결문을 읽던 김정아 부장판사는 유족에게 사과한 뒤 울먹이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유족과 시민단체 등 70여명이 참석한 방청석에선 격려의 박수가 터졌다. 김 판사는 눈물을 닦고 말을 이어갔다.

김 판사는 “피고 장환봉은 좌익, 우익이 아니라 명예로운 철도 공무원이다. 70여년이 지나서야 잘못되었다고 선언하게 되었는데, 더 일찍 명예로움을 선언하지 못해 사과드린다”고 했다. 판결을 마친 김 판사와 배석 판사와 검사, 법원 직원이 모두 일어나 고개 숙여 사과했다. 

무려 72년 만의 무죄 판결이었다. 26살 어린 신부는 29살에 총살당한 남편 대신 3살, 1살 어린 딸을 키워냈다. 이날 장씨의 부인(97)과 딸들이 재판정을 지켰다. 

▲ 지난 1월21일 한겨레 1면
▲ 지난 1월21일 한겨레 1면

순천역 철도공무원이었던 남편 장씨는 1948년 10월 국군이 순천을 탈환한 직후 반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체포돼 22일 만에 군사법원에서 내란과 국권 문란죄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곧바로 형이 집행됐다.

대법원은 지난해 3월 72년 전 판결문에 구체적 범죄사실과 증거가 없고 22일 만에 사형 선고·집행돼 적법한 절차 없이 체포·구속됐다며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밤에 시작됐다. 전남 여수에서 14연대의 일부 장교와 사병이 주도했다. 14연대는 6개월 전 제주에서 일어난 4·3사건을 진압하려고 무기를 잔뜩 싣고 출항하려던 참이었다. 남로당원이었던 김지회 홍순석 중위 등이 무기고를 점령하면서 제주 진압 출동을 막으려고 했다. 

박성환 전 조선일보 기자는 1965년 자신의 기자수첩을 묶어 펴낸 ‘파도는 내일도 친다’에서 “1947년 육사를 졸업한 3기생 안엔 공산주의자들이 특히 많아 약 80%에 달했다. 여순반란을 주도한 두 중위도 바로 3기생이다. 박정희는 나이는 많았지만 4기생”이었다고 기록했다. 

채병덕 장군은 박정희를 ‘여순반란 진압의 1급 공로자’라고 추켜세웠다.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쓴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도 여순사건 때 박정희의 역할이 나온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박정희 소장의 형은 공산주의자로 대구 폭동 때 처형당했고, 자신은 여순사건 뒤 군부 숙청 때 좌경 리스트에 올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형을 선고받았다가 상관의 구명운동을 석방됐다”고 했다. 

▲ 박정희 당시 소령(왼쪽 첫번째)이 여수와 순천에서 발생한 14연대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갔다. 사진은 작전 사령관이었던 송호성 준장(왼쪽 두번째)과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모습.
▲ 박정희 당시 소령(왼쪽 첫번째)이 여수와 순천에서 발생한 14연대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갔다. 사진은 작전 사령관이었던 송호성 준장(왼쪽 두번째)과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모습.

장준하 선생도 ‘사상계’ 1963년 11월호에 첫 대선을 치른 박정희를 향해 “대통령 취임 이전에 석연찮게 해명”했다고 썼다. 리영희 선생은 자서전 ‘여정’에서 좀 더 확실하게 “남로당 정보책이었던 박정희가 제공한 명단을 토대로 수많은 장교들이 희생됐다”고 썼다. 

그러나 이들 모두 1948년 10월 현장에 있진 않았다. 윤고종 조선일보 기자가 당시 현장에 파견됐다. 윤 기자는 그해 10월26일 여수의 비극을 이런 취지로 기록했다. “진압군은 포위망을 좁혀 들여 시내 가가호호를 뒤져 모두를 밖으로 내몰아 전 시민을 서초등학교, 중앙교(당시 종산교), 진남관 등에 수용해 버렸다. 숨어지내던 생존 경찰, 우익인사들이 5~6명씩 심사조를 만들어 가담자 색출을 시작했다. 총 가진 자, 손바닥에 총을 쥔 군살이 박힌 자, 미 군용 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 등은 즉시 학교 뒤편으로 끌고 가 즉결 처분해 버렸다.”

이날은 반란군이 떠나버린 여수에 국군 진압부대가 들어와 비무장 시민 1200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태우기 시작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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