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등 정부가 유료방송 인수·합병을 승인하면서 유료방송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개편 과정에서 노동자 고용안정성과 노동안전 문제 우려도 나온다. 통신 중심의 시장 변화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유료방송 업계의 현안을 점검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지난 16일 아침 9시30분, 서울 불광동 LG헬로비전 은평고객센터 앞. 흰색 경차 십수대가 줄이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LG헬로비전의 인터넷·케이블방송 설치·수리·철거를 맡는 기사들은 매일 9시 이곳에 출근도장을 찍는다. 이날 만나기로 한 설치기사 김동환씨(45)도 마찬가지다. 차량에 타는 기사들의 얼굴을 일별하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저희가 대기하는 아지트는 따로 있어요.” 15분 걸어 대조어린이공원에 다다르자 김씨가 공원 주차장에 서 있었다.

“아, 흰색 차량은 A/S 기사들 보신 걸 거예요. 우리는 센터 앞에 주차 못해요. 손님이랑 A/S만 할 수 있어요.” 공원 곁 빌라용 개인주차 공간이 김씨 전용이다. 그는 이곳 주인이 저녁에야 주차를 한다고 했다. 김씨 차량은 청록색 2006년형 투싼이다. “은평센터 설치기사들은 오전 일감이 없으면 공원 곳곳에 차를 대고 기다려요. 차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추우니 걸어다니기도 하고. 모여서 밥도 먹고요.”

▲김씨는 인터뷰차 근처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들어가잔 말에 따라나서며 ‘평소엔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언제 예약이 꽂힐지 모른다. 사진=금준경 기자
▲김씨는 인터뷰차 근처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가잔 말에 따라나서며 ‘평소엔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언제 예약이 꽂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진=금준경 기자

김씨의 이날 첫 일정은 낮 1시다. 오전 시간을 이용해 인터뷰차 근처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가자고 했다. 그는 따라나서며 ‘평소엔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언제 (예약이) 꽂힐지 모르니 맘 놓고 앉아 있을 수 없어요. 차량 히터도 안 켜고 기다리는 게 미련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다 비용이니까. 올해부터 유류비가 일부 나오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요. 그래서 겨울이 제일 힘들어요.” 차에 타려 조수석 문을 여니 뒷좌석과 트렁크에 셋톱박스와 모뎀, 케이블 등 장비가 빼곡하다. 새로운 서비스가 늘면서 가지고 다니는 장비 종류도 많아졌다. 지난달 떼인 주차위반 고지서가 뒷좌석 바닥에 놓여 있다. 토요일엔 5000원짜리 인터넷 전화 설치를 하러 갔다 3만 2000원어치를 떼였다. 과태료는 그의 몫이다.

김씨는 20년차 인터넷과 케이블방송 설치기사다. 그간 은평센터와 개인도급계약으로 일하다 지난해 말 A/S기사들과 같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 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해 케이블TV 설치는 기간통신사업자나 정보통신공사업 등록 사업자가 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고객센터들이 기사들을 도급계약에서 근로계약으로 전환했다. 원청인 LG헬로비전과 각 하청센터는 여전히 1년 단위로 계약한다. 원하청 계약이 중단되면 김씨는 해고다. 급여체계와 근무조건은 센터마다 다르다.

2시간 넘게 걸려도 40분 책정

김씨 입장에선 올해부터 고정급여 190만원을 받게 됐다. 한달 110포인트 설치 실적을 올리면 추가수당을 받지만 사실상 닿기 어려운 숫자다. “점수가 가장 큰 인터넷 설치가 0.7포인트, 하루 처리 건수는 6건인데요.” 지난 2주 그의 포인트는 20이었다. 한편 처음으로 헬멧과 안전화, 잡자재를 지급받았다. 차·사다리·드릴·드라이버 같은 고정 도구는 여전히 김씨 몫이다. 겉에는 ‘LG헬로비전’이 적힌 검은 파카를, 속엔 ‘CJ헬로’가 적힌 선명한 보라색 조끼를 입었다. 지난해 말 인터넷·IPTV사업자 LG유플러스가 CJ헬로를 인수하면서다.

▲김씨가 신축아파트 지하실에서 인터넷 개통을 위해 놓인 메인장비 포트를 찾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김씨가 신축아파트 지하실에서 인터넷 개통을 위해 놓인 메인장비 포트를 찾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김씨가 인터넷 연결 메인장비가 있는 아파트 지하 MDF실에서 진행 중인 작업을 기록지에 써 넣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김씨가 인터넷 연결 메인장비가 있는 아파트 지하 MDF실에서 진행 중인 작업을 기록지에 써 넣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1시 일감은 인터넷과 케이블TV, 무선공유기 설치다. 주어진 시간은 40분. 오가고 주차하는 시간을 합쳐서다. LG헬로 콜센터 상담원이 가입자에게 신청을 받아 김씨의 시간표에 일감을 ‘꽂으면’ 고객에게 확인 전화한 뒤 방문한다. “콜센터는 항상 40~50분 간격으로 잡아요. 한창 일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직후에 (새 예약이) 박혀요.” 업체가 기사와 사전 소통하거나 작업별 통상 소요시간을 조정할 순 없을까. “일부러 안 하는 거죠. 가입자가 딴 데 갈까봐.”

김씨는 1시께 고객의 아파트 지하에 차를 댔다. 경비실에서 ‘MDF실’ 열쇠를 찾았다. 지하 3층 MDF실엔 인터넷을 각 가정에 연결하는 메인 장비가 있다. 신호가 살아있는 인터넷 포트를 찾아두고 지상 3층 고객의 집 문을 두드렸다. 인터넷과 케이블 설치가 시작됐다. 김씨는 지하 3층과 지상 2층, 고객이 사는 3층을 반복해 오갔다. 메인장비에서 2층 중간단자함, 가정 내 단자함 사이 알맞은 포트를 찾아 연결한 뒤 모뎀을 연결해 신호가 뜨면 설치가 완료된다.

지하 3층과 지상 3층 사이를 4번째 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김씨가 말했다. “45분 지났어요. 아까 작업시간 끝난 거예요.” 시계를 보니 1시50분께. 다음 일정은 3시다. 김씨는 이때부터 계단을 두 칸씩 오르내렸다. 지하3층에 6번, 2층에 4번, 지하주차장에 1번 오간 뒤에야 가내 단자함에 신호가 떴고, 3시에 집안 공유기·케이블 설치가 끝났다.

▲김씨는 다음 예약인 오후 3시가 다가오자 움직임이 초조해졌다. 사진=김예리 기자
▲김씨는 다음 예약인 오후 3시가 다가오자 움직임이 초조해졌다. 사진=김예리 기자
▲김씨가 고객의 가내 단자함에 인터넷 설치를 마친 뒤 신호의 질을 확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김씨가 고객의 가내 단자함에 인터넷 설치를 마친 뒤 신호의 질을 확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잠깐만. 이거 화질이 너무 떨어지는데요?” 고객이 TV화면을 보고 말했다. “고객님, VOD 화질은 브랜드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유료케이블채널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인터넷 VOD 화질은 이전과 똑같습니다.” 김씨가 튼 케이블채널을 본 고객은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며 콜센터에 전화했다. 상담이 10분가량 이어지는 사이 김씨는 3시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했다. “죄송해요, 고생하셨는데. 이렇게 화질이 차이날 줄 몰랐는데.” 고객은 서명하지 않았다. “어휴, 아닙니다. 오늘 안에 철거기사가 올 겁니다.” 김씨는 회사에 전화를 걸어 보고한 뒤 포인트로 인정받기로 했다.

다음 고객의 인터넷 설치를 마치니 4시40분. 바로 지하주차장에서 5시 예정 고객에게 확인전화를 걸었다. 예약을 신청하지 않았단다. 고객은 며칠 전 콜센터와 상담하며 ‘16일에 다시 걸겠다’고 했는데 예약이 잡혔다며, “벌써 두 번째 받는 설치 전화”라고 했다. 김씨는 센터에 전화해 예약을 취소했다. “콜센터에선 일단 꽂고 보는 거예요. 이뤄지면 상담원 실적이 되니까요. 고객이 했던 예약을 취소해도 반영을 안 해서 꼭 설치기사가 한 번 더 전화하게 만들어요.” 5시까지 새 예약이 잡히지 않아 김씨 일정이 마무리됐다. 이날 2.3포인트를 얻었다.

▲LG헬로비전 인터넷·케이블 설치기사 김동환씨(45)는 예약이 잡히지 않은 시간 인근 아파트 주차장이나 공원에 차를 대 놓고 기다린다. 사진=김예리 기자
▲LG헬로비전 인터넷·케이블 설치기사 김동환씨(45)는 예약이 잡히지 않은 시간 인근 아파트 주차장이나 공원에 차를 대 놓고 기다린다. 사진=김예리 기자

눈비엔 건건이 목숨 걸고 해요

김씨는 일정이 끝난 뒤 차 안에서 “제일 시급한 건 안전하게 일할 시간”이라고 했다. “시간에 쫓겨다 보면 엎어지고 접질러요. 오히려 가입자가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럴 수가 없어요. 줄줄이 밀리는데요.”

그는 이날 일감은 신축 아파트라 비교적 쉬웠다고도 했다. “구형 아파트는 옥상에서 바깥으로 선을 내린 다음에 베란다 안에서 붙잡아 들여야 해요. 고개를 내밀어서 몸을 뻗어야 하는데, 눈비 오는 날엔 생각해요. ‘내가 몇천원을 벌려고 매번 이렇게 목숨을 걸어야 하나?’ 급할 땐 그 생각도 못해요.”

지난달 말 LG헬로비전 부산해운대고객센터 기사 김도빈씨가 하루 평균 14건을 소화하다 옥상에서 쓰러져 숨졌다. 지난해 딜라이브·KT 하청업체·LG유플러스 노동자들이 인터넷·케이블을 설치하다 추락해 숨졌다. 김씨는 안전하게 일할 수 있으려면 실적제를 없애고 LG헬로비전이 직접 설치기사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 취재에 민주노총 더불어사는희망연대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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