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링~’ 문자 왔다는 벨소리가 울린다.

‘제보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연필 50자루를 깎았습니다. 직원이 대뜸 저에게 아이들 학용품 준비를 부탁하더군요.’

은행에서 경비업무를 하는 A씨가 보낸 문자는 끝이 날 줄 몰랐다. 연필 50자루 깎기에서 시작한 문자는 아파트 분양관에 따라 나가 대출 업무를 상담한 내용, 고객을 대신해 타은행 업무를 봐야했던 내용, 우체국 업무나 고객에 명절선물을 직접 배송하느라 외근해야 했던 내용 등이 자세하고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경비업무와 상관없더라도 은행업무와 관련 있다고 생각해 그러려니 했지만. 연필 50자루 깎기나 직원 교육 대리 수강과 같은 은행 직원의 심부름에 A씨는 도저히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문자를 받은 건 은행경비연대 준비위원장 이태훈 씨. A씨 말고도 은행 경비원들이 보내는 갑질, 불법파견 제보로 그의 전화벨은 자주 울렸다. 조심스럽게 오는 제보들은 연필 50자루 말고도 ‘엽기적인 내용이 너무 많다’며 이태훈씨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담하고 싶다고 연락한 분 중에 대뜸 사진을 보냈어요. 어깨에 쌀을 이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조합장 집에 쌀 배달 간다더라고요. 어느 은행 경비원은 지역 축제 김장 행사에 동원된 적도 있고요. 가장 충격적인 건 대출업무예요. 은행 대출 창구에서 직원용 PC로 경비원이 대출 심사를 한 경우가 있어요. 이유는 뻔해요. 직원이 도와달라고 한 거죠.” 

“은행 경비원이 발렛파킹에 대출심사까지?”

이태훈씨가 일을 시작한 건 2014년, 용역업체에서 ‘청원경찰’을 뽑는다는 구인광고를 보고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두 군데 사무실과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뒤였다. 혼자 살고 있고 이제 막 사회에 나온 그에게 전공을 살린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할 만한 일은 이미 포화’였고 ‘등 떠밀려’ 뭐든 하긴 해야 했다. 당장 뭐라도 할 수 있으면 싶었고 ‘들어가기 쉬운 곳’이 꿈이고 목표가 되었다. 용역업체에서 1차 면접을 봤고, 본사와 지점에서 각각 두 차례 더 본 후에 일을 시작했다. 

출근 첫 날, 그는 모든 게 ‘생소’하고 ‘의아’했다. 청원경찰이 하는 일은 보안업무라고 생각했는데, 보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을 했다. 이게 맞는 건가 싶었지만 ‘처음이니까 군말 없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그는 청원경찰도 아니었다. 청원경찰은 국가기관이나 공공단체에서 보안업무를 하는 경찰들을 뜻했고,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민간 경비원이었다. IMF이후 은행 청원경찰이 민간 위탁으로 바뀌었지만, 지점도 용역업체도 여전히 청원경찰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상하고 생소한 것 투성이었다.

“환전기기에 돈 채워 넣고 고객들한테 음료 나눠주고, ATM 기계 고장 나면 그것도 고쳤어요. 카드신청도 받고 현금호송차량 운전도 해봤어요. 예전에 마트에서 보안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땐 정말 보안업무라고 할 만한 일을 했거든요. 은행은 보안 업무는 거의 없어요. 보안업무를 가장한 서비스직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일이 경비원의 일인지 모르겠는 건 태훈씨 같은 경비원뿐만이 아니다. 본사에서 경비업무 외에 다른 일은 지시하지 말라는 공고가 내려와도 지점은 입장이 다르다. 보안업무를 하는 중인데도 눈치를 주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온갖 일들을 부탁한다. 경비 업무가 아니라고 지점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해고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냥 입맛에 안 맞으면 나가라’고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에 스트레스를 참아가며 버티는 경우가 많다.

간혹 지점에서 잡무를 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고객들이 직접 ‘주차를 해 달라 아우성’인데다 ‘입금표 작성해 달라’, ‘세무서에서 서류 좀 떼 와라’ 부탁하는 데에는 거절할 도리가 없다. 은행 창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고객들한테 욕을 먹고 머리 숙여 사과하는 건 경비원의 몫이다. 태훈씨는 고객들이 경비원을 은행직원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걸 지적하며, 자신들은 용역업체 직원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처음엔 문제라고 생각 못 했어요. 솔직히 누가 ‘이거 못 한다’고 하겠어요. 우리 일 아니어도 그냥 하는 게 속 편하죠. 고객들 대신 세무서에 갈 때가 있는데, 위임장을 쓰잖아요.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생각할수록 뭔가 불안한 거예요. 위임장 썼다가 제가 피해를 볼 수도 있는데, 은행 직원도 아닌 저를 보호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세무서 가잖아요. 저와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몇 명씩 꼭 있어요. 저만 이런 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이게 문제라는 걸 알았죠.”

문제라는 건 알았어도 해결할 방법은 딱히 없었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가끔 용역업체에서 관리를 이유로 은행에 오긴 했지만, 형식적으로 서류에 서명하고 끝날 때가 많았다. 인터넷 구인 사이트에 있는 커뮤니티가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매일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가는 건, 그 때문이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은 보안업무와는 상관 없는 별별 크고 작은 잡무와 심부름으로 가득했다. 잔심부름에 모두가 불만을 품고 있었고, 카드 유치나 상품 홍보와 같은 업무에 ‘불법파견’ 아니냐는 글도 적지 않았다. 

은행마다 월급도 크게 차이 났고, 계약기간도 제각각이었다. 지점에서 시킨 대로 외근했다가 왜 자리를 비우냐는 고객 민원에 잘린 사람이 한둘이 아닐 만큼 해고는 너무 쉬웠다. 언제든  해고될 수 있다는 생각에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 

하소연을 읽으며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지만, 그렇다고 왜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는 일이 이해된다거나 불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커뮤니티엔 매일같이 들어오는 사람이 늘 있었고, 글을 올리는 사람도 많아졌다. ‘어떻게 이러고 계속 사냐’는 한탄은 ‘좀 바꿔야되지 않겠냐’는 물음으로 이어졌고, 개선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는 걸 보고 태훈씨도 ‘같이 해볼까’하는 마음이 커졌다.

▲ 은행경비원 이미지. 사진=gettyimagesbank
▲ 은행경비원 이미지. 사진=gettyimagesbank

“노조딱지? 이제 부담 안 가지려고요”

그가 정의당 비상구를 찾아간 건 노조를 만들려던 시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였다. 이전에도 뭔가 바꿔보겠다고 모였다가 흐지부지됐다는 애길 듣고 나니 태훈씨는 오히려 노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글을 자주 올리고 뭐라도 해보자 했던 사람 서넛이 먼저 모였다. 뭐부터 해야 할지 몰랐지만 일단 누구라도 만나야겠단 생각에 민주당을 찾았다. ‘거대 정당이 힘이 될 거’라는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기대감에 찾아갔지만 단번에 ‘까였다.’ 은행 경비원 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거대 정당이 아니라 우리 얘기를 들어줄 정당이 필요했고 정의당은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2017년에 비상구를 만나 경비원들 하소연이 명백히 경비업법 위반에 불법파견이고 부당한 갑질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용불안에 근로계약 위반하는 등 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비상구와 인터뷰한 내용이 언론에 실린 이후 기사에 나온 은행에서는 아예 잡무가 사라졌고 또 어떤 은행은 보안업무 외에 다른 일은 절대 지시하지 말라는 공문을 각 지점으로 보냈다는 얘기도 들었다. 노조를 만들기 위해 밴드를 개설했다는 글을 커뮤니티에 올리자 같이 해보겠다고 150여 명이 모였다. 정말 뭔가 되는가 싶었고 기대가 부풀었다.

따로 떨어져 일하는 경비원들이 뭐 좀 해보겠다고 150명이나 모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모였지만 노조를 만드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만 명 가까이 되는 경비원은 모두 생각이 달랐고 원하는 게 달랐다. 노조에 대한 인식이나 방향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용역업체에서는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 와 태훈씨는 온갖 욕을 들어야했다. 열심히 할수록 비난도 커졌고, 사람들은 기대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해고 위협에 밴드를 탈퇴하는 사람들마저 늘어났다. 모두가 ‘잘릴까’ 두려웠고 힘이 빠졌다. 태훈씨는 ‘노조’라는 단어를 쓰기 꺼리는 듯 ‘노조’라는 말 대신 매 번 연대를 조직하는 거라고 바꿔 말했다. 노조 가입하면 불이익을 주겠다던 회사의 압박이 그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 묻고 싶어졌다.

“걱정 돼요. 앞길에 문제가 생기니까. 벌이 수단이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는데 그게 보장이 안 되니까 불안하죠. 솔직히 노조 딱지 붙으면 취업 안 되잖아요. 그런 부담이 컸었죠. 그래서 한동안 쉬었어요.”

그럼에도 그가 다시 노조를 만들겠다고 힘을 낸 건 노조 딱지에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또 실패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모두 밴드를 탈퇴하고 노조설립은 물 건너 간 듯 했을 때도 끝까지 버틴 사람들도 아홉이나 되었다.

노조를 준비하면서 경비원 대부분이 자기처럼 20~30대 청년일 거라고 생각했다. 청년층만큼 40~50대도 많았고 정년이 2년도 남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많은 경비원 대부분은 가정의 가장이었고, 그 돈으로 생활하고 아이들을 키운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사실이 무겁게 느껴졌고 그 무게감이 활동을 쉬던 내내 그를 짓눌렀다. 노조 준비하다 실패했다는 비난을 듣기 싫은 것도 사실이지만, 끝까지 남은 사람들, 여기 아니면 갈 데 없는 사람들의 기대를 모른 척 하고 싶지 않았다. 노조 딱지에 대한 두려움보다 바꿔야겠다는 의지가 더 컸다. 

최근 그는 ‘은행경비연대’ 명함을 새로 만들고 다시 비상구를 찾았다. 3년 만에 또 경비원들의 제보를 받으며 사람들을 모으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한 번 시행착오를 겪은 만큼 한 발자국 더 걸어갈 힘이 생겼다고 그는 믿는다. 

태훈씨는 탄핵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2016년을 종종 떠올린다. 수십 만명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모이는 장면은 어떻게 생각해도 뭉클하고 흥미로웠다. 꾸준히,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모여 한 목소리를 내고 결국 대통령을 끌어내린 사건은 더 없이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더 놀라운 일이었다. 전혀 관심 없던 ‘정치라는 게 뭔지’ 알고 싶었고,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소수정당에 가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 사람, 소수의 목소리지만 그 소리가 ‘옳은 것’이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면 같이 목소리를 낼 누군가는 반드시 있다는 것, 그 소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배웠다.  우리가 가야할 방향으로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냈을 때 그 힘이라는 건 대통령도 탄핵시킬 만 한 것이었다. 그는 종종 노조 딱지가 부담스럽고 두려워질 때면 2016년을, 그 때의 꾸준함과 연대의 힘을 떠올린다. 그 힘으로 갑질이라고, 불법파견이라고 끌어내지 못할 리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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