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이 즉시 항복해 수백만 희생을 치른 태평양 전쟁이 종식됐습니다. 가공할 원자폭탄의 위력인지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연구조직으로 제일 먼저 오늘날의 한국원자력연구원(원연)을 설립했습니다. 원전현장에 근무하다 원연에 입소해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가히 자긍심과 애국심이 충만한 곳이었습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핵으로 에너지와 국방문제를 해결한다고 매진해 중수로,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를 성공했습니다. 초기 우리나라의 척박한 과학기술기반에서 열정으로 노력하신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너무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불철주야 연구실에서 핵연료 개발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쳐 돌아가신 연구원도 계셨습니다.

1986년에는 경수로 설계기술 이전을 위해 최고 인재를 선발해 미국 CE사에 보냈는데, 출정식이 마치 특공대를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한필순 박사(당시 연구소장)께서 모든 일을 주도했는데 미국 사무소장겸 인솔자였던 이병령박사도 CE사 기술이전이 초과 달성되도록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기술이전은 성공적이었고 한전 등 산업계와 함께 오늘날 UAE 원전 수출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원연 앞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태극기가 게양됐고, “원자력은 국력”이라는 철탑이 소내에 설치됐으며, 북의 핵기술자가 수만명이니 남에도 최소 5천명의 연구원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최고 엘리트들의 자긍심은 한때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상징되기도 했습니다.

▲ 한국원자력연구원.
▲ 한국원자력연구원.

그러니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은 그동안의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고 과학자로서의 애국충정마저 무시당하는 느낌을 주었을 것으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좌익이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배반하는 사람이며, 중국 동해안에 잔뜩 건설하는 중국 원전의 위험성은 말도 못하면서 국내 원전의 위험성만 언급해 세계 최고의 원전기술을 흠집내고, 황금알을 낳는 수출도 포기해 원전생태계가 무너지고 고급기술자들이 해외로 빠져 나간다는 등등의 주장에서 이러한 허탈감과 우려를 읽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최근 원안위원으로 임명되신 이병령 박사께서는 우리나라 한국형 원전은 수소폭발이 발생하지 않는 세계 최고의 기술로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원전과 노형이 달라 안전하고 저렴하며, 탈원전으로 인프라가 붕괴되면 에너지 빈국인 우리나라 에너지안보에 타격을 주게 되므로 탈원전정책은 “국정문란”이라는 주장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원전사고를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노형이나 기술수준 보다는 인적 오류이며, 그 인적 오류는 100% 방지할 수 없다는 점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체크밸브가 거꾸로 설치됐고, 안전밸브가 잘 닫히지 않아 냉각재 누설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핵연료가 녹았음에도 인지하지 못했던 미국 TMI 원전사고, 터빈 테스트 도중 정지되면 재가동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안전장치를 끄고 시험하다 폭발한 체르노빌, 침수될 줄 모르고 지상에 있던 비상발전기를 지하로 이설하고, 쓰나미 높이를 제대로 대비하지 않은 후쿠시마 등 세계 3대 원전 중대사고가 다 그렇습니다.

원자력진흥을 위한 불타는 애국심은 존경하지만 원로분들께서는 냉엄한 원전의 안전현실을 국민과 후배들에게 제대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고리1호기는 여야 합의로 폐쇄됐고, 월성 1호기는 다수의 안전 현안이 있음을 중수로 설계에 참여한 후배들에게 물어보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탈원전 반대, 원전안전 홍보, 경제성 평가 비판, 원전수출사업 등 안전과 무관한 발언은 다른 곳에서 하시는 것이 적절합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안전에서 비롯되는데 원자력안전위원으로 중책을 맡아놓고 공부도 안하면서 원전이 안전하다고만 말씀하시면 안전은 대체 누가 다루겠습니까?

▲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6월19일 오전 부산 기장군 장안읍 해안에 있는 고리원전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영구정지 터치 버튼을 누르고 있다. ⓒ 연합뉴스
▲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6월19일 오전 부산 기장군 장안읍 해안에 있는 고리원전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영구정지 터치 버튼을 누르고 있다. ⓒ 연합뉴스

또한 영구적인 핵폐기물로 인한 갈등과 단 한번의 사고로 돌이킬 수 없는 원전의 근본 문제는 세계에너지시장 판도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전은 줄고 신재생에너지의 설비투자는 대폭 증가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유망시장으로 조속히 전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켜야 할 핵심기술은 지켜야겠지만, 축소되는 원전시장을 고집하는 것은 변화를 거부하고 함께 도태되자는 무책임한 주장이며 신재생, 방사선융복합 등 더 큰 시장을 가진 신성장 분야에 원자력기술은 얼마든지 접목될 수 있습니다. 원자력뿐 아니라 모든 사업은 시장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도 한때 자국 건설수요에 기반해 원자력 산업이 성장하였지만 수요한계에 봉착하자 수출을 통해 출구를 찾으려 하였지만 결국 웨스팅하우스, 아레바, 캐나다원자력공사 등 세계의 원자력 기업들 대부분 망하기 직전이거나 고전하고 있습니다. 이 전철을 그대로 따라갈 것입니까?

2000년대 초 원전사업 분야를 프랑스(프라마톰사)에 판매한 독일의 SIEMENS사는 신재생에너지분야에서 지금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것을 보면 결코 바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원전을 점진적으로 축소하는 세계 시장추세에 그저 따라가는 수준이지, 우려하시는 독일과 같은 완전 탈원전은 시도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해외 모범 사례를 참조하기는 커녕 현재와 같은 일방적 탈원전 프레임에 의한 의도적이고 무조건적인 탈원전 반대는 안전에 대한 현실을 심각하게 호도하는 동시에 세계시장 흐름마저 놓치고 모두를 희생시키자는 망조의 논리입니다.

이 땅의 원자력 원로분들께 진심으로 요청드립니다. 오늘날처럼 원자력이 정략적 도구로 전락한 적도 없을 듯합니다. 국가와 민족번영을 위해 그동안 피땀으로 구축하신 원전산업이 도태되지 않고 시장변화에 잘 대응하는 출구전략을 적극 모색하고 변화와 혁신의 기업가 정신으로 세계시장에서 계속 성장하도록 원전 산업계에 촉구해 주시길 진정으로 부탁드립니다. 희망의 경자년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소원성취하시길 기원하며,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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