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 기타 사유로 근무지에서 교체요청이 있을 경우 해고돼도 이의가 없으며, 해고로 인한 어떠한 불이익도 본인이 감수하겠습니다.” A은행 지점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B씨는 지난해 5월 용역업체가 근로계약서와 함께 내민 서약서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근무지에서 교체요청’은 굵은 글씨로 강조됐다. 은행 측이 해고해도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B씨는 별 수 없이 서명했다. 은행 지점장이 2차 면접도 봤다.

#C은행 경비원 D씨는 은행 직원들 업무를 대행한다. 아파트 분양관 대출업무에 동행해 모바일 계좌와 카드를 만들고, 불만고객을 상대하는 일 등을 도맡는다. 다른 은행 고객의 대출상환 업무까지 한다. 모두 지점장 지시다. 시간외수당은 받지 못한다. 어떤 날은 은행 직원 자녀의 색연필 50자루를 깎으란 지시를 받았다. D씨는 거부하지 못했다.

전국 은행에서 용역업체를 통해 경비원을 배치하면서도 경비 외 업무를 시키는 관행이 만연해 불법파견·경비업법 위반이란 지적이 나온다. 고용불안을 이용한 업무상 범위를 넘어선 갑질도 비일비재하다.

정의당 비상구(비정규직 상담창구)에 따르면 경비원들은 간접고용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도 계약서에 명시된 경비업무 외에 현금(동전) 세기, 현금지급기 수리, 전표작성, 금융상품 홍보, 택배 포장과 운반 등 갖가지 은행의 업무지시를 받아 수행하고 있다. 

▲은행경비원 B씨와 용역업체가 맺은 서약서 5번째 조항에 “본인은 (...) 기타 사유로 근무지에서 교체요청이 있을 경우 해고돼도 이의가 없으며, 해고로 인한 어떠한 불이익도 본인이 감수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정의당 비상구 제공
▲은행경비원 B씨와 용역업체가 맺은 서약서 5번째 조항에 “본인은 (...) 기타 사유로 근무지에서 교체요청이 있을 경우 해고돼도 이의가 없으며, 해고로 인한 어떠한 불이익도 본인이 감수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정의당 비상구 제공

전국 대다수 은행은 용역업체를 통해 경비원을 간접고용하고 있다. 경비원은 업체 소속 기간제 계약직으로 일한다. 이들은 은행마다 1~2명 배치돼, 은행 내부를 예의주시하며 금고를 지키고 소방관련 안전 점검과 비상시 기동서비스 연락 등 보안업무를 맡는다. 이들은 원래 은행 직속이었지만 1990년대 후반 파견법이 제정된 뒤 속속 외주화됐다. 비상구는 전국에서 1만명 정도가 은행경비원으로 일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원청인 은행이 B씨와 D씨 경우처럼 경비원에게 업무를 지시하면 불법파견이다. 파견법에 따르면 원청은 파견 2년 뒤 파견직원을 직접고용해야 한다. 경비 외 업무 지시는 경비업법 위반이다. 경비업법은 “경비업자는 허가받은 경비업무외의 업무에 경비원을 종사하게 해선 안 된다(7조5항)”고 정하고, 위반하면 경비업자 허가가 취소된다.

문제는 은행경비원 간접고용과 불법파견 실태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강연 비상구 노무사는 “전국 은행경비원들이 모여 집담회를 하면 국내 5대 은행에서 일하는 경비원들이 비슷한 처지란 반응이다. 그러나 어느 어느 은행이 몇 개의 업체로 몇 명을 간접고용하는지는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다. 비상구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은행 내 경비원 간접고용 실태를 조사한 적이 없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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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은 불법파견·경비업법 위반 소지를 인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IBK기업은행의 경우 ‘경비원 업무지시가 법 위반’이란 지적이 나온 뒤 진행한 내부 설문조사에서 용역업체 5곳이 경비원 700여명에게 ‘업무지시를 받은 적 없다’고 답하도록 강요한 사실이 언론보도로 알려지기도 했다.

전국 은행경비원들이 꾸린 은행경비연대와 비상구는 “은행경비원들이 취약한 고용조건인 데다 노동부 감시망 밖에 놓이다 보니 인권 침해에 취약한 상황”이라며 노동부에 실태조사를 촉구했다. 이들은 “노동부가 시중 은행별 은행경비원 인적구성, 임금과 노동시간 등 노동조건, 도급계약을 맺고 있는 용역업체 현황 등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근로감독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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