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회 출입기자들은 하루에도 몇 건씩 총선 출마 예비후보들의 출판기념회나 출사표를 문자나 메일로 받는다. 문자에 찍힌 그분들 이력을 훑어 보면 대부분 ‘386’ 세대다. 

살아 있었으면 박종철도 그들과 비슷한 연배였을 거다. 

영화 ‘1987’에서 그랬듯 서울대생 박종철은 1987년 1월14일 새벽 경찰청(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 끝에 타살됐다. 1987년 ‘6월 항쟁’은 박종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 그의 죽음은 결국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 주말 박종철 33주기를 맞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김세균 박종철 열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이 자리에서 그가 꿈꿨던 민주주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절차적·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사회적 민주주의로 이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 박종철 열사의 33주기를 이틀 앞둔 1월12일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 조성 예정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 열사의 3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사진은 박 열사의 형 박종부 씨가 발언하고 있는 모습. 사진=민중의소리
▲ 박종철 열사의 33주기를 이틀 앞둔 1월12일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 조성 예정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 열사의 3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사진은 박 열사의 형 박종부 씨가 발언하고 있는 모습. 사진=민중의소리

그가 죽은 지 33년이 지난 지금 그가 어떤 세상을 꿈꿨는지 오롯이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많지 않다. 어떤 언론도 이 부분을 주목하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이었던 박종철은 1985년 5월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함께 사당동 일대에서 거리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잡혀 구류 5일을 살았다. 

그는 1985년 6월 구로공단 민주노조들이 벌인 구로동맹파업에도 연대했다.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노조가 그해 6월24~29일까지 서울 외곽 구로공단에서 고립돼 힘겹게 싸웠다. 그는 고립된 노조의 싸움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공장 옆 거리시위에 나섰다. 당시 그는 ‘가오리’로 불렸던 ‘가리봉동 오거리’로 매일 출근했다. 그는 거리 시위 도중 경찰에 잡혀 또다시 구류 3일을 살았다. 

그는 구로동맹파업이 끝나고 1985년 여름방학 땐 구로공단 옆 대림동의 한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 투신을 준비했다. 

이듬해 1986년 4월11일에는 전태일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청계피복노조의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돼 1986년 7월15일 출소했다. 

그는 1987년 1월13일 밤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고문 끝에 숨졌다. 그는 철거되는 도시빈민과 살인적 노동강도에 시달리면서도 공돌이 공순이 소리를 들어야 했던 이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했던 동료들은 좀 달랐다. 경찰은 그에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추궁했지만 그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죽음으로 지켰던 박종운은 훗날 한나라당 부천·오정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이 돼 총선에도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민주당으로 옮겨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 했던 그의 염원을 오롯이 지켜낸 이는 드물다. 

▲ 1997년 6월10일, 6월 민주항쟁 10주년을 맞아 서울대 IMC관앞 언덕에서 지난 1987년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씨를 기리는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사진은 추모상을 보며 슬퍼하는 아버지 박정기씨. ⓒ  연합뉴스
▲ 1997년 6월10일, 6월 민주항쟁 10주년을 맞아 서울대 IMC관앞 언덕에서 지난 1987년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씨를 기리는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사진은 추모상을 보며 슬퍼하는 아버지 박정기씨. ⓒ 연합뉴스

아들의 죽음 이후 아버지 박씨는 아들을 대신해 평생 거리에서 싸웠다. 김대중 정부 땐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회장을 맡아 민주화 운동으로 희생된 이들의 진상 규명을 위해 400일 넘게 거리에서 농성했다. 그 결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다. 이제 아버지 박씨도 2년전 숨졌다. 

그의 희생 위에 세워진 민주화가 이 땅에 뿌리 내리려면 그가 손 잡았던 도시 빈민과 노동자가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사회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무임승차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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