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차별을 넘어 자부심으로, ‘Pride Over Prejudice’(POP)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 사회의 성소수자 혐오를 다룬 미디어 생산물을 모으고 시각화하는 프로젝트다. 한국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는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만드는 갈등요인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매해 퀴어문화축제를 앞둔 때면 언론은 ‘충돌이 예상된다’는 보도를 쏟아내고, 성소수자 권익활동을 비롯한 차별금지 운동은 ‘역차별 우려’ 주장 앞에 번번이 무너졌다. 이런 차별과 혐오의 기억들을 주체적 역사로 재구성하는 과정엔 어떤 고민들이 있었을까.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한 시각 예술가 제람, 서체 디자이너 숲,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라파엘 라시드를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이번 프로젝트는 왜 기획하게 됐나.

제람: 나는 크리스천 성소수자로서 교회 안에서 분투를 했었다. 신앙공동체 기능 중 하나가 내면을 나누는 거라 생각해 고민을 얘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고초를 겪었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면서 성소수자 관련 뉴스 미디어 아카이브(LAGNA, Lesbian And Gay Newsmedia Archive)를 알게 됐다. 19세기 후반부터 성소수자가 생산하지 않는 생산물을 모은 방대한 아카이브였다.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와 시민들이 나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반면 런던 경찰 아카이브에는 성소수자들이 혼란을 야기하고 국가 질서에 좋지 않다고 기록돼 있었다. 같은 이슈가 다르게 표현되는 걸 보고 우리가 직접 사유하는 역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도 ‘퀴어락’(QueerArch)이 있지만 도서·영상·문서 등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디지털 기록 여력이 부족한 점이 아쉬웠다. 그런 찰나 2018년 연구공모(이창국퀴어연구지원기금)가 있어서 지원하게 됐다.

-‘아카이빙’ 작업은 어떤 의미가 있나.

제람: 흩어져 있는 정보가 모이면 힘이 될 수 있고, 조각조각 나뉘어 있던 것들을 엮었을 때 흐름과 맥락을 볼 수 있다. 보통 아카이빙을 하면 관련 주제 연구자들을 위한 기초 자료 목록이 된다. 이 아카이브는 성소수자 대상 종교적 혐오가 일어나고 있고, 이것이 생각보다 많이 알려지지지 않고 있다는 걸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하려 했다. 정보 자체가 사람을 위로하고 울리는지 몰랐는데,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었던 이들의 목소리들이 기록되는 것 자체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연대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걸 느꼈다.

▲ 1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POP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작업한 시각예술가 제람(왼쪽부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라파엘, 서체예술가 숲이 전시 관련 논의를 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1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POP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작업한 시각예술가 제람(왼쪽부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라파엘, 서체예술가 숲이 전시 관련 논의를 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POP 프로젝트는 △퀴어문화축제 △차별금지반대운동 △경남학생인권조례안 △대학 내 성소수자 활동 등 4개 사건을 큰 축으로 한국사회에서의 성소수자 혐오를 다룬 미디어 생산물 120여건을 살펴봤다. 주요 신문사, 방송사, 중립 뉴스미디어(뉴스통신사 중심), 기독교 미디어, 소셜미디어 생산물이 주요 대상이다. 주요 미디어가 다루지 않은 성소수자 이슈는 장신대·한동대 학생들의 부당징계를 계기로 결성된 인권단체 ‘갓길’(같이 걷는 길)의 생산물 등으로 보완했다. 해당 사태로 학교에서 사실상 쫓겨난 학생들로부터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문 등을 모아 공백을 채웠다.

저널리스트인 라파엘이 SNS에 기록한 사진·영상, 자체적으로 발굴한 자료들도 활용했다. 퀴어문화축제 현장의 생생한 기록, 한국 언론이 다루지 않은 한국 정부의 성소수자 관련 UN 연설 등이다. 라파엘은 “개인적으로 1년 반쯤 전부터 성소수자 차별 이슈 관련 보도들을 포털에서 수집했다. 하루에 2~3번씩은 관련 기사들을 찾았다. 소위 ‘조중동’ 같은 대형매체 기사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작지만 중요한 매체들의 의미있는 뉴스들도 있다. 어떻게 이런 사건들을 고민할 것인지 생각하다 아카이브를 만다는 게 그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영국 출신으로 한국 생활 9년차에 접어든 라파엘은 한국 미디어가 ‘동성애 혐오단체’를 혐오단체라 부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국 미디어가 성소수자 혐오 확산에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나.

라파엘: 한국 미디어는 종교적 매체 뿐 아니라 대부분 미디어가 ‘혐오’를 ‘논란’으로 치부한다. 예를 들어 퀴어문화축제가 열릴 때마다 뉴스 헤드라인은 ‘퀴어문화축제 이번 주말 열려…긴장감 높아’, ‘충돌 우려’처럼 우려, 충돌이란 단어가 계속 사용된다. 충돌은 양측이 서로 부딪힌다는 의미인데, 실제로 축제에 가면 항상 한쪽에서 공격을 한다”고 했다. 또한 “한국 미디어는 항상 ‘종교단체’, ‘반대단체’라며 혐오세력 주장을 인용하는데, 실제로 그들이 ‘종교적 단체’라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확산된다’는 식의 잘못된 주장을 한국 미디어가 그대로 퍼다 나르면서 잘못된 정보가 일리 있는 말처럼 둔갑하기도 한다.

-영국에선 어떤가.

라파엘: 영국에선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없다. 간단하다. 혐오발언은 불법이다. 혐오범죄는 불법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도 불법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런 혐오 표현을 너무 많이 볼 수 있다.

▲ 2018년 9월8일 인천시 동구 동인천역 북광장에서 열린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 현장. ⓒ연합뉴스
▲ 2018년 9월8일 인천시 동구 동인천역 북광장에서 열린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 현장. ⓒ연합뉴스

라파엘은 한국 미디어가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혐오를 부추긴 예로 몇 가지 보도 사례를 들었다. 지난해 마약 투약 혐의를 받은 연예인을 ‘아웃팅’한 보도가 그 중 하나다. 그는 “일부 언론이 ‘동성애 혐의’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는 걸 보고 충격 받았다. 사건은 ‘마약 투약’에 대한 것이고, 한국의 인권보도준칙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 경우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을 밝히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모두가 ‘게이, 게이, 게이’를 반복했다”고 지적한 뒤 “영국에선 지난주 백수십건의 강간을 저지른 강간범 보도를 할 때 헤드라인에 ‘남성’이라고 쓰지 않았다. TV에서도 성별이 강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다룬 한국 언론 보도 중에선 ‘남성’이나 ‘젊은 남성’을 부각한 제목을 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제람은 “다수가 얘기하면 맞는 주장으로 들리고, (언론에) 많이 인용되면 사실처럼 느껴진다”며 “물리적인 인력 동원의 크기나 수가 자주 노출돼 사실로 느껴지게끔 만드는 것들은 뉴스 보도량에 비례된다”고 지적했다.

소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제목에서 ‘And’를 ‘Over’로 바꾼 프로젝트 주제는 줄여서 ‘POP’이라 부른다. 작업자들은 영어로 ‘튄다’는 의미의 ‘POP’처럼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딛고 넘어서는 명랑하고 유쾌한 기운”을 프로젝트의 시각적 콘셉트로 세웠다고 설명했다. 프로젝트 전용 서체로는 ‘길벗체’를 만들었다. 최초로 무지개 깃발을 만든 LGBTQ 활동가 고 길버트 베이커를 기리는 영문 ‘길버트체’에 착안해 한글 ‘길벗체’를 디자인했다. 길벗체는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등 다양한 성소수자 상징색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작업자들은 향후 이 서체로는 혐오·차별 표현을 쓸 수 없게끔 기능적 보완이 이뤄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시각화 작업을 하면서 어떤 부분에 중점을 뒀나.

숲: 내가 서체디자이너이다 보니 어떻게 하면 서체로 연대하고, 우리 주제에 동감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사람들이 함께 쓸 수 있는 서체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대부분 전시는 접근성이 높지 않고, (알아듣기 쉬운 설명보다) ‘쿨’한 걸 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프로젝트는 그보다 아카이브를 읽으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전시 참여 자체만으로 이 사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많은 디자이너들은 특정 주제를 독점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길벗체는 길버트체가 ‘오픈소스’였기에 만들 수 있었다. 작업자들이 이런 연대를 통해 새로운 디자인 결과물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 '차별과 혐오를 넘어 자부심으로! Pride Over Prejudice' 전시 포스터.
▲ ‘차별과 혐오를 넘어 자부심으로! Pride Over Prejudice’ 전시 포스터.

POP 프로젝트는 16일 공개된다. 이날부터 웹사이트가 열리고,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팩토리2’에 오프라인 전시가 이어진다. 제람은 1월16일이라는 날짜에 대해 “제가 군대에서 성소수자인 게 아웃팅돼서 정신병원에 116일 동안 갇혔는데, 마침 나온 날도 1월16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지난날 스스로 말할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한 고통을 새기고, 커뮤니티와 연대를 위한 의미를 담은 날짜라는 것이다.

-오프라인 전시에 꼭 오길 바라는 대상이 있나.

숲: 전시를 준비하면서 장소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주제를 듣고 곤란하다는 곳들도 많았다. 전시 주제를 들은 회사 동료 등이 당황하거나 ‘그건 좀 위험하지 않느냐’는 식의 반응을 한 일도 많았다. 나를 멀리하는 듯한 느낌이나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런 걸 경험하다보니 평소에 성소수자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번 전시를 보고 나면 성소수자를 이해할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소수자 이슈를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전시가 됐으면 좋겠다.

제람: 우리 목표는 10분 내에 ‘누구나’ 다 보고 나갈 수 있는 전시다. 성소수자 이슈를 대략적으로 들었지만 제대로 이해하기엔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사안에 너무 개입해 설명하기보다 뉴스를 읽어주는 것처럼 보는 사람이 스스로 해석하고 느낄 여지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디자이너들 중에서 시각적으로 뭔가를 꾸며보고 싶긴 한데 컨텐츠를 찾기 어려운 분들, 사회과학·언론 관련 일을 하는 분들도 많이 찾아줬으면 좋겠다.

라파엘: 전시장에서 청와대가 너무 가깝다. 정말 가깝다. (웃음)

끝으로 제람은 “앞으로도 사회에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하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의 작업이 그 다음을 위한 디딤돌이 돼야 살 수 있다. 그래야 후원과 관심이 이어진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넘어진다. 물론 많은 도움도 있었다. 저는 서울에 살지 않기 때문에 수익이 나오지 않는 동안 생활비 하라고 돈을 준 친구도 있고, 방을 내어준 친구도 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이 전시가 작고 소박하지만 그 의미가 잘 전달돼서 그 이상을 할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됐으면 좋겠고, 소신을 잃지 않고 작업할 수 있도록 도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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