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촬영이) 23시간이었다. 겨울 야외촬영이었다. 그날은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이 혹사당하고 있다.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은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고 드라마 제작 현장 노동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설문조사에는 아동·청소년 연기자 103명이 참여했다. 

보호 받아야 할 아동·청소년 연기자는 성인 연기자와 마찬가지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기시간 포함 장시간 촬영 경험을 묻자 하루 12시간 이상이라는 응답이 61.2%였다. 이들 가운데 2.9%는 ‘24시간 이상’이라고 밝혔다.

야간 촬영 경험은 68.9%로 높게 나타났는데 당사자 동의를 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야간 촬영 결정 과정에서 “특별한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54.3%로 과반이었다. 일방 통보 하거나 반대 의사를 드러냈으나 강행한 경우가 여기에 포함된다. “드라마 제작 초반 한 번만 동의를 구했다”는 응답은 18.6%에 불과했다. “동의를 수시로 구했다”는 응답은 25.7%에 그쳤다.

▲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은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고 드라마 제작 현장 노동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김용욱 기자.
▲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은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고 드라마 제작 현장 노동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김용욱 기자.

연기 활동으로 수면이 부족하다는 응답은 69.9%로 3명 중 2명은 피로를 호소했다.

심층 면접결과 한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보호자는 “10시간 새벽 촬영도 한 적 있다. 새벽에 중간에 나오라고 할 때도 있었다. 새벽 3시나 5시에 콜인 경우 그때는 교통편이 없다”고 했다. 한 아동·청소년 연기자는 “몸이 피곤해서 만성피로”가 있다며 “주말에 촬영 없을 때  많이 잔다”고 했다. 그는 “한 겨울에 (촬영) 다니면 기본적으로 5시간 밖에 못 잔다. 그래서 영양제를 먹는다”고 했다.

욕설 등 인격 모독 경험이 있다는 응답은 26.7%였다. 촬영장에서 욕설이나 외모 지적을 듣거나 다이어트, 성형을 강요받는 등의 경우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아동·청소년 연기자는 ‘대응’하기 힘들다. 피해 경험이 있다고 밝힌 응답자 가운데 76%는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서” 혹은 “캐스팅에 불이익이 생길까봐” 참고 넘어갔다. 드라마 촬영 시 입은 피해를 ‘관련 기관’에 신고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폭력·선정적인 드라마 장면을 촬영한 경험’을 묻는 질문에 “잔혹하거나 폭력적인 장면”(7.77%, 8명) “신체접촉 등 선정적 장면”(1.94%, 2명)을 촬영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이들 10명을 대상으로 당시 동의 여부를 물었는데 2명은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 허정도 배우가 아동청소년 연기자 인권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용욱 기자.
▲ 허정도 배우가 아동청소년 연기자 인권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용욱 기자.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81.6%가 수익을 본인이 아닌 보호자가 관리했다. 본인 계좌로 받아 직접 관리하는 경우는 13.6%에 그쳤다. 미국에는 미성년자 연예인의 수익 15%를 신탁회사의 계좌로 입금해 성인이 되면 돌려주는 ‘쿠건법’이 있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은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권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하고,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배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은 ‘수면권’ ‘학습권’ ‘휴식권’ ‘노동시간’ 등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해당 법을 “잘 알고 있다”는 응답은 6.8%에 그쳤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을 향한 ‘인권침해’ 축소를 위한 대책을 묻자 ‘아동청소년 연기자 보호를 위한 전담 감독관 파견제도’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응답자가 34.48%로 가장 많았다. 이어 ‘가해자에게 엄격한 법적 조치’ ‘피해사례 신고센터 설치’ ‘제작진 대상 인권교육 프로그램 마련’ 순이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배우 허정도씨는 “같이 밤을 새면서 나보다도 힘든 티를 안 내던 아이. 무리한 촬영에 몸이 아파도 병원도 못가고 계속 촬영해야 했던 아이. 혹한의 날, 훨씬 얇게 입고도 춥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리던 아이. 날카롭게 후벼 파는 폭언에도 그저 고개만 떨구던 아이”를 언급하며 “촘촘한 보호막이 필요한 아이들은 여전히 허술하기 짝이 없는 울타리에 방치돼 있다”고 지적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 아동·청소년 연기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하도록 개정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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