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방송인 임택근(88) 아나운서가 지난 11일 숨졌다. 대부분의 언론이 두 아들 임재범·손지창과 얽힌 가족사를 주로 소개했지만 아나운서 임택근은 한국 방송사에 굵직한 행적을 남겼다.

박정희 대통령과 식사를 함께 했고, 육영수 여사가 직접 전화로 감사를 표했던 사람, 그가 숙직하는 날이면 고급 요정에서 무료로 야식을 들고 올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그는 군사정부 땐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도 다시 MBC에 임원으로 복귀해 사장 직무대행까지 지냈다.

임택근은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KBS 아나운서가 됐다. 스포츠 중계를 처음 맡아 현장방송을 마치고 복귀하자 선배들은 “너는 아나운서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그런 만큼 거의 모든 종목의 스포츠캐스터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 50대 이상의 국민이라면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고 시작하는 국제경기 시작을 알리는 임택근 아나운서의 멘트를 누구나 기억한다.

일제 때 조선은행에서 첫 조선인 과장을 달았던 아버지 덕분에 유복했던 임 아나운서는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 당시를 회상하며 임 아나운서는 “누나는 가난한 사람 티를 내려고 얼굴에 석탄재를 바르고 아버지의 허름한 양복을 입고 중절모까지 눌러썼다”고 했다.

피란지 부산에서 임택근은 KBS가 대북 선무방송을 위해 아나운서를 뽑을 때 합격했다. 그는 현역병으로 입영하지 않고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국방부 심리전 요원을 겸직했다. 그는 인민군을 상대로 귀순을 종용하는 방송을 주로 했다. 집안의 아저씨 항렬인 임대순이 육군대령으로 국방부 정훈국장을 맡고 있을 때다.

▲ 고 임택근 아나운서. 사진=MBC 제공
▲ 고 임택근 아나운서. 사진=MBC 제공

임택근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왔다. 장기집권에 눈 먼 이승만 정부는 1955년 2월 정부조직을 개편해 공보처를 대통령 직속 공보실로 바꿔 버렸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은 3선 출마가 가능해졌다. 1956년 3월26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81살 생일이었다. 대통령 축하는 상상을 초월했다.

KBS는 이날 방송 모두를 이승만 탄신 축하 프로그램으로 채웠다. 새벽 5시30분 축하 아악 방송을 시작으로 오전 6시30분엔 김광섭 시인이 쓴 헌시 ‘뛰어나신 생애’를 낭독했다. KBS는 이후에도 ‘대통령 찬가’, ‘우리 대통령 여든한 돌 맞이’ 등의 프로그램을 보냈다. 오전 10시30분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축하식을 중계했다. 당연히 임 아나운서가 중계를 맡았다. 11시30분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보냈다. 오후 2시엔 탄신축하 분열식을 실황중계했다. 저녁 5시30분엔 아악을 재방송하고 어린이 시간엔 ‘꽃다발을 드립시다’는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저녁 6시45분엔 또다른 시인이 쓴 ‘온 겨레의 영예 이승만 박사’라는 축시를 낭독했다. 하루 종일 탄신축하 방송에 많은 아나운서가 동원됐다.

50년대 임택근의 인기는 놀라울 정도였다. 택시 기사는 임택근을 태운 게 영광이라며 요금을 받지 않았다. 팬레터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쏟아졌다. 사무실로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임택근이 숙직하는 날이면 일류 요정이나 음식점에서 밤참을 보내곤 했다. 한번은 임택근이 아시아여자농구 중계를 마치고, 엄앵란이 아시아영화제를 마치 돌아올 때 같은 비행기를 타고오자 대중 잡지 하나가 임택근과 엄앵란의 약혼설을 대서특필했다. 1957년 8월15일부터 한 달 간 방송문화연구실에서 아나운서 인기도를 측정해 월간 ‘방송’에 발표했는데 임택근이 단연 1위였다.

50년대 국군의 날이면 으레 세종로에서 사열식을 하고 오후엔 한강변에서 공군 에어쇼를 진행했다. 이 행사 중계는 임택근이 도맡았다. 임택근은 1960년 초 주사(6급)에서 사무관(5급) 승진시험을 쳤다. 당시 KBS 직원은 공무원이었다. 혹사당한 그는 당연히 백지로 내고 왔다. 정부는 고심 끝에 별정직이란 직제를 새로 만들어 그에게 따로 시험 보도록 배려했다. 그만큼 정권 차원에서 그가 필요했다. 1960년 3월15일엔 대통령 선거도 있었으니.

3·15 부정선거는 4·19로 폭발했지만 그가 일하던 KBS는 단 한 줄의 시위기사도 싣지 않았다. 이런 시국에 정부는 KBS에 이승만 대통령의 4선을 축하하는 브리그스 미 국무장관의 축하메시지를 방송하라고 엉뚱하게 지시했다. 물론 이 방송도 임택근 아나운서가 직접 했다. 시위대가 KBS로 몰려왔다. 그는 담 넘어 피신해 국립박물관 관사로 숨었다. 학생들은 그를 찾아내 따졌다. “당신은 운동장에서 슛 골인, 이런 것은 잘하면서 학생들이 피 흘리는 현장은 왜 중계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KBS가 침묵한데 반해 서울의 기독교방송(KY)와 부산의 문화방송(KU)은 어려운 여건에서 방송의 본분을 다했다. 부산문화방송은 마산과 부산의 시위를 현장에서 생중계해 방송저널리즘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승만이 하야하자 임택근 등 KBS 언론인들은 방송 중립을 선언하며 자성했다. 2공화국이 들어서자 그는 대북방송만 전담하는 제2방송으로 잠시 쫓겨났다. 이듬해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방송 중립은 휴지가 됐다. 방송은 다시 국가의 앵무새로 돌아왔다.

1961년 5월18일 아침 박정희 군부는 KBS에 전화해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관제 데모를 할테니 그걸 생중계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이 중계도 임택근이 직접 했다. 그는 동대문에서 시청까지 생도들을 따라 걸으며 중계했다. 당시 방송 요지는 “혁명을 지지하는 뜻으로 씩씩한 화랑의 후예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였다. 이 중계를 계기로 임택근은 박정희 의장이 머물던 장충동 공관에 불려가 박정희 내외와 저녁을 함께 먹었다.

박정희 정권은 북에서 밀사로 내려왔다가 처형 당한 황태성이 갖고 온 공작금 20만달러로 급하게 텔레비전 방송을 준비했다. 그렇게 1961년 12월31일 저녁 7시 KBS가 첫 영상 전파를 쐈다. 이 개국식도 임택근이 사회를 봤다. 그가 남산에 모인 귀빈들 앞에서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KBS 텔레비전방송입니다. 지금 이순간부터 KBS 텔레비전의 첫 전파가 발사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라고 시작하는 멘트를 쳤다. 박정희 의장과 임택근의 모습이 흑백 화면으로 나란히 나왔다. 갑자기 정전이 돼 사방이 깜깜해졌다. 급조한 TV 방송은 이렇게 털컹 거리며 출발했다.

1950~1960년대 KBS는 거수기에 빚대 ‘거구기’로 불렸다. ‘구(口)’는 입을 뜻했다. 시키는 대로만 말하는 ‘정권의 입’이었다. 그 중심엔 임택근이 있었다.

임택근은 텔레비전 방송 개국과 함께 시작한 ‘그랜드 쇼’를 진행했다. 언론학자 김민환 교수는 ‘그랜드 쇼’를 “가히 역사적인 프로였다”고 격찬했다. 당시 그가 분장비로 받은 수당이 원만한 공무원 월급보다 많았다.

KBS의 간판이었던 임택근은 1964년 4월 텔레비전 방송을 준비하던 MBC로 이적했다. MBC 방송부장으로 승진한 그는 KBS의 유능한 방송인력을 빼오라는 첫 임무를 맡아 최세훈 임국희 강영숙 등 간판급 아나운서와 함께 이적했다.

MBC는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삼성 재벌이 뒷배를 봐주는 TBC와 피 말리는 경쟁을 이어갔다. 두 방송사의 치열한 경쟁은 우리 방송의 질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임택근은 60년대 후반부터 MBC 임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중요한 프로그램은 직접 진행했다. 그와 함께 MBC는 1970년 방송 변화를 선도했다. 젊은 층을 겨냥한 팝송 디스크자키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청취율 1위를 고수하는 인기를 누렸다. 명동의 한 음악다방 디스크자키를 하다 이 프로를 진행한 이종환은 별밤지기가 돼 청년문화를 이끄는 아이콘이 됐다.

1965년 7월 임택근은 MBC 이사로 승진해 새로운 뉴스 포맷을 선보였다. 이 때 처음 기자가 앵커가 돼 뉴스를 진행했다. 아나운서가 기사를 읽을 때는 밋밋했지만 직접 현장을 뛰는 기자가 현장 감각을 살린 방송으로 뉴스는 완연히 생동감이 넘쳤다. ‘뉴스의 광장’은 월~토요일까지 저녁 7시20분부터 8시까지 40분간 방송했는데 다른 방송사의 청취율을 훌쩍 뛰어 넘었다. 이 때부터 MBC는 뉴스에서 단연 앞섰다.

1967년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도 임택근과 강영숙 아나운서가 함께 밤새 진행했다. 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의 각축으로 일대 접전을 벌이다 박정희가 51.4% 지지로 승리했다. 다음날 그는 또 청와대의 부름을 받고 대통령과 식사했다. 그는 “밤을 꼬박 새고 아침 10시쯤 해장국집에 가서 허기를 때운 뒤 개표방송을 마무리하려고 종합방송실로 갔더니 청와대 육영수 여사로부터 강영숙 아나운서와 함께 잠시 들르라는 전갈이 왔다는 거예요. 11시50분경에 나는 밤을 샌 얼굴 그대로 강영숙 아나운서와 함께 청와대로 갔어요”라고 회상했다. 박 대통령도 식당으로 내려와 임택근과 강영숙의 어깨를 두드렸다.

MBC는 텔레비전 방송을 1969년에 처음 시작했다. 물론 이 개국식도 임택근이 진행했다. MBC는 TV 개국과 함께 아침방송으로 ‘임택근 모닝쇼’를 방영했다. NHK의 기지마 노리오가 ‘기지마 모닝쇼’를 하는 것을 본 땄다. 그는 “일본 신문이나 일본 방송잡지, NHK 사보 등을 보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걸 어떻게 써먹을까 궁리했어요. 때로는 동경 특파원에 부탁해 일본 프로의 녹화테이프를 보내게 해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어요”라고 회상했다. 이렇게 70~80년대 우리 방송은 일본 프로그램 포맷을 자주 베꼈다.

자기 이름을 딴 TV쇼로 인기 절정에 달했던 그는 모닝쇼에서 하차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 총선에 그를 공화당 후보로 내세웠다. NHK에서 ‘기지마 모닝쇼’를 진행하던 기지마 아나운서가 최고 득표율로 당선되는 것을 보고 공화당은 그를 차출했다. 그는 대통령의 간곡한 제의를 거부할 수 없었다. 박 정권은 김대중의 오른팔인 김상현(서대문을)을 꺾을 비밀병기로 그를 내세웠다. 야성이 강했던 수도 서울에 당선자를 내고 싶었다. 임택근은 선거운동 당시를 회상하며 “선거자금으로 청와대에서 2000만원이 내려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선거는 싱겁게 끝났다. 김상현은 6만 표 넘게 받았지만, 임택근은 4만표도 못 받았다.

MBC는 낙선해 실의에 빠진 그에게 복직하라고 했다. 그는 MBC 상무로 복귀했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엔 그랬다.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숨지자 큰 딸 박근혜씨가 퍼스트레이디를 맡았다. MBC는 1977년 1월3일 저녁 8시 신년 TV 특집 프로그램으로 ‘대통령 영애 박근혜 양과 함께’를 방영했다. 당시 MBC 전무였던 임택근이 사회를 봤다. 신년 초 황금 시간대에 대통령 큰 딸과 대담하는 방송도 당시엔 정상이었다.

MBC는 1978년부터 방송의 국제화를 추구하면서 서울국제가요제를 열었다. 1978년 7월1일 토요일 밤 세종문화회관에서 1회 서울국제가요제가 막을 올렸다. 10개국 정상급 가수 21명이 참가한 이 개막식도 임택근이 했다. 서울국제가요제는 MBC 공채 1기 김우룡 PD가 빈틈없이 준비했다.

문제는 1980년 3회 대회를 준비하면서 벌어졌다. 5·18이 터졌는데 국제가요제를 하는 게 맞느냐를 놓고 토론을 거듭하던 MBC는 가요제를 강행하기로 했다. 3회 가요제 준비에 한창일 때 전두환 신군부가 임택근을 불렀다. 전두환 장군의 저녁식사에 동석하라는 지시였다. 국제가요제 집행위원장인 그는 1980년 5월23일 가요제 전야제를 핑계 대고 초대를 거절했다. 가요제는 성공했지만 비판도 많았다. 고심하던 MBC는 가요제 입장료 수익금 3000만원 전액을 광주시민돕기 성금으로 기탁했다.

신군부는 MBC와 경향신문 책임자를 교체했다. 최석채 회장은 미련없이 사표를 냈다. 5·16재단은 최 회장과 이환의 사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임택근은 1980년 6월 MBC 사장 직무대행을 잠시 맡았다. 바로 다음달 서울신문 이진희 주필이 새 사장으로 왔다. 이렇게 임택근은 30년 동안 손에 쥔 마이크를 내려놨다.

안타깝게도 그는 피란지 부산에서 선배 장기범 아나운서에게서 방송의 정치적 독립의 중요성을 배웠지만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진 못했다. 가르침을 실천하기엔 인기가 너무 많았고, 방송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정권도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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