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게 병이라고 했던가. 하필 미디어오늘의 그 기사(KBS해리스-BBC존볼턴 인터뷰 어떻게 달랐나)를 본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과거의 인연 때문인지 예나 지금이나 나는 어떤 기사에서든 KBS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내가 그 기사에 주목한 것도 KBS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기사를 읽어본 뒤 자연스럽게 7일자 KBS9뉴스를 다시보기를 통해서 리뷰해 봤다. 뉴스를 본 느낌은 띵~함을 넘은 분노였다. 속이 아주 불편했다.

7일은 문재인 대통령이 대국민 신년사를 한 날이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올 한 해 국정운영의 기본 방향과 실천적 내용들을 국민들에게 밝히는 메시지다.

대통령 신년사는 당연히 언론이 주목해야 할 아주 중요한 뉴스다. 물론 어떤 관점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으로 다룰 것인지는 언론이 판단할 몫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 KBS9뉴스는 ‘신년사 뭉개기’였다. 내가 분노라는 단어를 꺼낸 이유도 이 때문이다.(이런 표현이 믿기 어렵다면 뉴스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보기 바란다.)

문 대통령 신년사는 총 30분 분량이다. 그런데 특별히 놀랍다고 생각되는 건 이 30분 동안 ‘비핵화’라는 말, 심지어 ‘핵’이라는 단어조차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는 거다. 단호한, 어떤 결심의 결과고 전환에 대한 예고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문제에서 무언가 중대한 방향 전환을 할 거라는 조짐은 지난 2일의 신년 합동인사회에서 이미 드러났다. 그날 문 대통령은 “평화는 행동 없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연초 중요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건, 올해는 평화를 위해서 구체적 행동을 하겠다는 의지의 피력 말고는 달리 해석하기 어렵다. 모두에게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지난 한 해는 너무 허망하게 지나갔다. 그래서 궁금했다. 대통령이 의중에 담은 한반도 평화를 향한 그 행동이 어떤 것인지.

7일의 신년사는 그 ‘행동’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담았다. 문 대통령은 “북미대화가 성공하면 남북협력의 문이 더 빠르게 활짝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북미대화의 교착 속에서 남북관계의 후퇴까지 염려되는 지금 북미대화의 성공을 위해 노력해나가는 것과 함께 남북협력을 더욱 증진시켜 나갈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밝혔다.

북미대화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당연한 얘기를 했지만 방점은 분명하게 남북협력의 증진에 찍혔다.

신년사는 1분 40초의 인사말에 이어 경제, 복지, 국민안전, 부동산, 무역, 공수처법 등 10여개가 넘는 주제들을 20분 안에 담았고, 이어 남북관계에 무려 5분40초를 할애했다. 그 어떤 주제보다 긴 시간이다. 이 5분40초 동안 문 대통령은 ‘평화’라는 단어를 13번이나 언급했다. “함께 살아야 할 생명공동체”, “8천만 겨레”와 같은 농도 짙은 말도 나왔다. 이런 사실과 함께, 30분 동안 단 한마디도 비핵화를 언급하지 않은 사실을 묶어서 해석하자면 대통령의 의지가 무엇인지는 아주 명확해진다. 언론이라면 당연히 이런 의중을 읽었으리라.

그런데 당일 KBS9뉴스는 어땠는가?

대통령 신년사는 첫 번째 꼭지로, 내용 전체를 뭉뚱그려서 2분5초 길이로 보도했다. 두 번째 꼭지는 청와대를 연결해 앵커와 기자가 문답하는 형식으로 야당의 입장과 신년사 내용의 실효성, 한미 관계에서의 우려 등을 2분26초로 담았다. 세 번째는 ‘김정은 위원장, 문대통령 신년사에 호응할까?’라는 제목으로 문대통령의 제안에 대한 북한의 반응을 전망했다. 시간은 1분56초다.

두 꼭지 모두 첫 번째 내용을 보충하기보다는 그 의미를 흠집 내는 내용들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4번째 꼭지, 해리스 미국 대사 인터뷰다.

우선 해리스 대사 인터뷰는 시간도 3분11초로 압도적으로 길다. 메시지도 분명했다. “남북관계는 비핵화 속도에 맞춰야” 하고, 신년사에서 문 대통령이 밝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답방’이나 ‘DMZ 유네스코 공동 등재’ 등 남북협력 사업들도 모두 미국과 협의해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 듣던, 새로울 것 없는 얘기다.

말은 협의지만 이게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국민들은 별로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터뷰를 진행한 김경진 기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질문을 한 부분이다. 김경진 기자가 직접 질문한 부분은 이렇다. “북한이 ICBM 발사 등으로 이른바 ‘레드라인’을 넘는다면 미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요?”

말하자면 ‘북한이 도발하면 미국이 혼내 주실 거죠? 뭐 이런 질문이다.’ 참 어이가 없다. 대통령은 평화의 길로 가겠다고 말하는데, 기자는 호전적 답변을 유도해 전쟁을 연상케 하고… 그것도 굳이 최악의 (가상의)상황을 전제하면서.

▲ 지난 7일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의 KBS 인터뷰 화면.
▲ 지난 7일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의 KBS 인터뷰 화면.

과거에는 대통령이 신년사를 하면 언론들이 화려하게 분칠해 주는 일이 흔했다. 이젠 그런 시대도 아니고 그런 짓은 국민을 속인다는 점에서도 옳지 않다. 그렇다 해도 대통령이 남북평화 증진의 구상을 밝히는 신년사 발표 당일, 해리스를 불러내서 전쟁 분위기까지 풍기면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옳았는가?

설혹 미국 입장을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신년사를 발표한 당일은 피하는 게 대통령에 대한 예의고, 국민적 자존심을 지켜주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이날 KBS의 9뉴스는 대통령 신년사가 중심이 아니고, 해리스 대사의 메시지가 중심이 되고 말았다. 평화의 메시지는 훼손됐고, 비핵화, 북한의 위협, 위기, 동맹 등의 단어들이 부각됐다.

해리스 대사의 인터뷰는 KBS이사회에서도 크게 질타를 받았다고 한다. 조용환 이사는 “한국 공영방송이라면 미국 대사가 국민을 모욕하는 태도에 비판을 제기했어야 했다”고 하고, 다른 이사는 “공영방송이라면 응당했어야 할 질문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지적조차 지엽적이다. 본질은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를 해리스를 통해서 반박케 함으로써 대통령은 낮춰 보이게 만들고 해리스는 높여 보이게 만든 뉴스 편집 그 자체다. 의도했던 안 했던.

전혀 새로운 것도 없는 똑같은 미국의 입장, 더욱이 해리스가 누구인가? 비록 미국이라고 하더라도 일개 대사에 불과한 자, 그것도 이미 오만한 태도로 인해 국민의 지탄을 받았던 자가 아닌가? 그런 자를 맞세워서 자기 나라 대통령을 깎아내리게 하다니. 이건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 혹은 정파적, 이념적 스탠스의 문제도 아니다. 그냥 한국의 공영방송이 견지해야 할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그 무엇인가가 부족한 것이다. ‘대통령 신년사 뭉개기’라는 평가가 결코 과하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 보도와 관련해서 KBS에 불쾌감을 느낀 적이 작년에도 있었다. 대통령 임기 2년을 맞아 송현정 기자와 가졌던 인터뷰다. 그래도 그 때는 불쾌감 정도였다. 지금은 다르다. 분노, 아니 분노를 넘어 서글픔마저 느낀다.

지난해에 걸쳐 올해까지 국민들이 갖는 의문이 있다. ‘검찰은 왜 저러나?’하는 의문. 그 의문에 하나를 더 보탠다. ‘KBS는 왜 저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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