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안이 논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허다한 탐구와 경험을 거쳐 진리로 인정된 것에 우리는 ‘상식’이라는 이름을 붙여 번거로운 논증의 수고를 덜곤 한다.

한나라당의 마산집회는 두가지 상식을 새삼 환기시킨다. ‘정(政)’이 국(國)’에 우선할 수 없다는 상식, 그리고 지역감정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상식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마산집회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말’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그것은 마땅히 규탄의 대상이 된다. 그것도 가장 강한 톤으로, 그리고 그 ‘말’의 상스러움 만큼이나 원색적인 표현을 동원해 규탄해도 마땅한 ‘말’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규탄의 주체가 되었어야 할 신문의 대다수는 또 다시 정치논리를 동원했다.
지역감정을 자극한 ‘말’ 맞은편에 여당의 정치력 부재를 세워놓고 양비론을 펼친 것이다. 덕분에 집회장의 ‘말’에 대한 규탄 강도는 약화됐고, 더러는 정치공방의 중계요소로 ‘격하’되기도 했다.

<‘지역감정’ 공방가열>(경향), <여 “지역감정 선동” 야 “민심이반 실종”>(동아) <‘마산집회’ 여야격돌>(조선) <정국 ‘마산집회’ 대치>(중앙) 등 한나라당의 마산집회를 전하는 25일자 신문들의 제목은 한결같이 ‘공방’ 또는 ‘대치’이다.

각종 칼럼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대부분의 신문이 사설에서 한나라당의 지역감정 자극을 비판하면서도 여당에 대한 ‘훈수’를 잊지 않았다.

그 내용은 두가지. 한나라당이 장외로 뛰쳐나가게 된 데에는 법안 날치기와 같은 여당의 독선이 주원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영남권에서 들불같이 번지고 있는 악성 유언비어에 발을 달아준 것은 다름 아니라 인사정책 등에서 실정을 한 정부여당이라는 점이었다.

신문의 이같은 평가에는 지역감정 선동행위를 정치적 차원으로 해석코자 하는 의지가 깔려있다. 그 대표적 사례를 보자. 조선일보는 26일자 사설 <마산과 여야>에서 지역감정 선동을 ‘지엽말단의 현상’이라고 규정했다.

“‘악성 유언비어’나 ‘야당의 선동’이라는 것은 언제나 지엽말단의 현상이고, 그런 지엽말단이 있기까지에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누적돼 있다는 점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아왔다.”
굳이 토를 달자면 조선일보는 엄밀한 분류법에 입각해 원인과 결과를 나눠놓고 원인에 더 큰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원인의 실체는 또 다른 귀절에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숙종 때의 이른바 ‘환국(換局)’ 정치처럼 서인이 득세하면 남인이 싹쓸이 당하고, 남인이 득세하면 서인이 싹쓸이 당하는 식의 정치가 2000년대에도 재현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신문은 ‘현재’를 지향한다는 말에 입각한다면 조선일보는 결국 보복정치를 감행하고, 싹쓸이를 자행하는 주체, 즉 정부여당을 겨냥하고 있다. 정부여당이 집권 후에 서인이 남인을 싹쓸이하듯, 또는 남인이 서인을 싹쓸이하듯 보복정치를 자행하니까 영남 정서가 악화됐고, 지역감정 선동이란 ‘지엽말단의 현상’이 빚어진 것 아니냐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25일자의 ‘조선만평’이, 가뜩이나 마산집회장의 지역감정 선동발언으로 뒤숭숭한 판에 정부의 지역편중정책을 비아냥댄 것도 이런 인식의 소산 아니겠는가.

지역감정이 판을 치면 정치가 절딴 나는 건 둘째 치고 나라가 망한다는 ‘상식’ 수준의 맞논리로는 웬지 부족한 느낌이다. 조선일보의 주장이 워낙 확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상식’을 첨가하면 어떨까. 상대방이 주먹으로 한대 팼다고 칼을 휘두르는 행위는 결코 ‘정당방위’ 요건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과잉방어’로 규정돼 철창행을 면치 못하는 게 법상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나라당은 정당방위를 한 것인가, 과잉방어를 한 것인가. 여기서 새삼 떠오르는 것은 ‘정’은 ‘국’에 우선할 수 없다는 ‘상식’이다.

문화일보의 <취재수첩-지역감정 호소 ‘되풀이’>(25일자)나 <한국만평>(26일자)이 한나라당의 지역감정 선동을 강력 규탄하고 나선 것도 망국병 재발만은 막아야 한다는, 너무나 상식적인 ‘소신’의 결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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