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무현 대통령 뒤엔 늘 1988년 ‘5공 청문회 스타’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그 유명한 ‘명패’사건도 이때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초선이었던 노무현 의원은 결코 이런 해프닝 만으로 단숨에 유명해지지 않았다. 국민들 눈은 정확했다. 한번의 쇼맨쉽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1988년 11월2일 5공 비리 청문회가 시작됐다. 헌정 사상 첫 청문회였다. 청문회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과 언론기관 통폐합, 일해재단 비리 등을 주제로 이뤄졌다. 청문회는 KBS와 MBC로 생중계돼 국민들 반응은 뜨거웠다. 

노무현 의원은 5공 청문회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준비했다. 자료를 시간 순으로, 관점별로 정리해서 언제 어느 때 무슨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다 이해하도록 준비했다. 다른 의원들 질문과 증인 답변도 체크하면서 증인의 엉터리 답변을 짚었다. 

당시 노 의원의 청문회 첫 날 첫 질문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게로 향했다. 노 의원은 장세동에게 ‘88년 평화적인 정권 교체 준비 연구’라는 문서에 대해 질문했다. 영구집권을 위한 5공 연장을 염두에 둔 문서가 아니냐는 쪽이었다. 이렇게 노 의원의 질문은 큰 그림 속에서 이뤄졌다. 

▲ 초선의원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89년 12월31일 5공비리특위, 광주특위 연석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사람사는세상
▲ 초선의원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89년 12월31일 5공비리특위, 광주특위 연석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사람사는세상

5공 청문회를 지상파가 생중계한 건 우연과 필연이 겹친 행운이었다. 1988년 나란히 노조가 들어섰던 KBS와 MBC에선 무엇보다도 적폐청산이 화두였다. 때마침 들어선 13대 국회도 헌정 사상 첫 여소야대였다. 국회는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위원장은 당시 통일민주당 부총재인 이기택 의원이 맡았다. 

‘5공 청문회’를 준비하면서 이기택 위원장이 KBS를 방문했다. 당시 KBS 내부는 정구호 사장이 퇴진하고 서영훈 사장이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결국 이기택 위원장과 박성범 보도본부장 직무대행이 청문회 중계 문제를 논의했다. 

정회 시간이 예정 없이 길어지면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 등을 논의한 끝에 녹화방송으로 하자고 얘기가 오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KBS는 생중계로 최종 결정했다. 편집해서 내보내면 5공 세력에게 불리한 거는 다 뺏다고 국민들의 오해를 받을 염려 때문이었다. 정권의 나팔수라는 오명에서 헤어나려는 당시 KBS 구성원들의 고육책이었다. 

한완상 서울대 교수와 최창섭 서강대 교수, 고희일 KBS 초대 노조위원장, 정기평 MBC 초대 노조위원장이 월간지 ‘샘이깊은물’이 마련한 자리에 나와 ‘방송 민주화’를 주제로 대담했다. 네 사람의 발언은 ‘샘이깊은물’ 1988년 12월호에 9쪽에 걸쳐 실렸다. 

당시 대담은 국회 ‘5공 청문회’가 한창인 가운데 열렸다. 정기평 MBC 노조위원장은 이 대담에서 당시 상황을 “우연성과 필연성이 겹쳐서 그렇게 됐다. 필연성은 시대적 흐름이었고, 우연성은 KBS가 녹화방송을 하려 하니까 MBC는 생중계로 가자고 했다”고 소개했다. 결국 두 지상파의 선의의 경쟁 심리가 청문회 생중계를 결정했다. 

첫 여소야대였던 30년 전 국회는 원내교섭단체만 4곳으로 사실상 다당제 국회였다. 거대 두 정당이 독식하지 못하는 다당제 국회에선 우연과 필연이 조화를 이루며 이렇게 의미있는 정치 발전을 이뤄내기도 했다. 앞으로 석 달 뒤엔 다시 총선이 열린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