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용 기자를 처음 본 건 2014년 10월이었다. 서울 상암동 YTN 사옥 앞에서였다. 그는 두 달 전 전자신문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해직자였다. ‘박근혜 정부 들어 첫 해직 기자’였다. 이날은 2008년 MB정부의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으로 해고된 YTN 기자 6명의 복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었다. 연대 발언자로 나선 그는 몹시 야위고 피곤한 모습이었다. YTN 해직 기자들 복직을 호소하던 목소리는 굵고 선명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2014년 11월 그에 대한 회사 징계가 ‘부당 해고’였다고 판정했지만 이후 이 기자는 인천 송도에 있는 광고마케팅국으로 발령받는 등 고초를 겪고 회사를 스스로 떠났다. 전자신문에서의 ‘20년 6개월’은 그렇게 끝이 났다. 2015년 11월 뉴스타파로 자리를 옮긴 그는 여전히 방송·통신·IT·과학기술 관료, 이른바 ‘체신 마피아’들을 감시하는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은용 뉴스타파 객원기자의 2014년 10월 모습. 그는 당시 전자신문 해고 언론인이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이은용 뉴스타파 객원기자의 2014년 10월 모습. 그는 당시 전자신문 해고 언론인이었다. 사진=김도연 기자.

연초에 그를 다시 만난 이유는 책 때문이었다. 지난해 12월 펴낸 ‘침묵의 카르텔’은 ‘20년 6개월’과 자본 앞에 무너진 한국 언론 현실을 되짚는 르포르타주다. 그는 부당 징계에 대한 정제되지 않은 사감 표출보다 ‘기록’을 택했다. “무너지거나 기억을 잊지 않으면서 교훈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한 권도 버리지 않았던 기자수첩이 든든한 뒷배가 됐다.

“벽 사이에 홀로 멈춰 서 있을 순 없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민주 틀, 노동조합과 함께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어깨동무 틀, 노동조합과 함께 전자신문 안 침묵의 카르텔을 깨려 했다. (중략) 오직 하나 밖에 없던 민주 틀에 스며든 몹쓸 입김과 폭력을 짚고, 오직 하나밖에 없던 어깨동무 틀이 어찌 망가졌는지를 내보이기로 했다. 왜? 망가진 틀이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책 P.10)

지난 2일 서울 당산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이은용 기자에게 ‘희망’부터 물었다. 자본 앞 언론에 희망이 있는 거냐고. 그는 “확률적으로 높지 않지만 몇몇이 언론사 지분을 독점하는 구조가 아닌, 서로 견제할 수 있는 바탕 위에서 편집국 젊은 기자들이 단단하게 뭉쳐 ‘정론직필’ 환경을 만든다면 신문들도 되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 이은용 기자가 지난해 12월 펴낸 책 ‘침묵의 카르텔’.
▲ 이은용 기자가 지난해 12월 펴낸 책 ‘침묵의 카르텔’.

이 말을 복기한 이유는 2014년 ‘전자신문 삼성 사태’ 때문이다. 그때 전자신문은 삼성 앞에서도 단단해 보였다. 그해 3월17일 전자신문은 “현재 삼성전자의 렌즈 생산 수율은 20~30% 수준에 불과해 자칫 갤럭시 S5 생산에도 차질이 생길 공산이 크다”고 보도했다. 삼성은 이에 반발해 크기와 위치를 미리 정한 ‘굴욕의 정정 보도’를 요구했다.

“전자신문 오보로 인해 삼성전자가 혼신을 기울여 만든 제품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에 대한 자구책으로 심사숙고 끝에 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정했다”는 삼성에 전자신문은 “자사 이익에 부합하지 않고,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썼다고 해당 언론사와 기자들에게 억대 소송을 거는 행위는 충분히 ‘언론 길들이기’로 비춰질 만하다”고 맞섰다. 당시 전자신문 사장이 ‘삼성 돈’을 포기하고 편집국장이 ‘대오단결’을 주문했던 ‘자본과의 전쟁’은 6개월 만에 사실상 오보를 인정하는 ‘알립니다’로 끝을 맺었다. 전자신문이 패배했다는 게 업계 평가였다.

이 기자는 “비슷한 내용을 보도했던 언론사가 싸우지도 못하고 삼성에 굴복하면서 전자신문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언론계에 터져 나왔고 시민들 응원도 컸다. 6개월 정도 싸웠으나 결국 삼성 뜻대로 손을 들게 됐다. 이후 편집국에는 패배주의가 팽배했다. 기자들이 많이 떠나갔고 자괴감에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 이은용 뉴스타파 객원기자가 지난 2일 서울 당산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이은용 뉴스타파 객원기자가 지난 2일 서울 당산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비단 삼성만이 아니다. 이 기자가 책에 서술하듯 삼성·SK·LG 등 국내 대기업 재벌 다수는 “IMF 사태 뒤로 11년여 동안 신자유주의 탐욕이 활짝 다 핀 흐름을 탄 한국에서 가장 덩치 크고 힘센 자”들이었으며 그들은 그 힘으로 “전화 한두 서너 통으로 기사 알맹이를 바꾸거나 아예 들어내는 힘”을 과시한다.

전자신문은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이후인 1982년 ‘전자시보’로 탄생했다. 한국 전자산업 진흥이 목적이었다. ‘전자산업 도우미’였지만 80년 해직 언론인들과 유신에 맞섰던 동아투위 해직 언론인들이 전자신문에 모였다. 동아투위 위원으로 옥고를 치른 박종만과 이기중이 편집국장이었던 탄탄한 언론이었다. 1995년 그가 입사했을 때 주필과 편집국장, 노조위원장이 면접위원으로 나란히 했던 언론사. “광고나 사업 수익 따위에 크게 얽매지 않아 기자 품위가 선 신문” 시절이었다.

이 기자는 인터뷰에서 “언론사 지배구조가 설사 소수 지배 또는 족벌 체제라도 그 족벌들이 기사를 쓰는 당사자들은 아니다. 실제 가장 큰 힘을 가진 집단은 편집국이다. 그 안에서 기자들과 노조가 단단하게 뭉쳐 올바른 보도를 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든다면 공정 보도를 지킬 수 있다”고 했지만 IMF를 거치며 공고해진 자본 힘과 소수 주주 지배력 앞에 ‘공정 보도 사수’는 바람 앞 등불 처지라는 걸 우리 모두 체감한다.

책 첫 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황우석 논문 조작’ 사태는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는 거짓말을 ‘애국’으로 포장하는 데 여념 없던 언론은 스스로 검증을 포기했다. 전자신문 과학기술팀 기자였던 이은용 기자와 동료들은 황우석 취재 보고와 검증 아이템을 발제했지만 위에선 짓밟기 일쑤였다. 간부들은 그의 기사 한 문장을 들어내 ‘비판’ 기사를 ‘찬양’ 기사로 뒤바꾸기도 했다. 전자신문뿐일까. 그가 본 당시 언론은 이랬다.

“그 무렵 황우석으로부터 받은 신용카드로 자기 술값을 치르거나 설과 추석맞이 특별 쇠고기를 꾸준히 받아먹은 기자가 여럿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황우석과 몇몇 기자 사이 관계가 알맞지 않다는 걸-공정보도 체계에 어긋난다는 걸- 잘 알았음에도 나는 ‘나쁜 일’이라고 짚지 못했다. 황우석이나 기업과 권력이 준 술값 신용카드와 명절 쇠고기는 기자 발목에 채운 쇠사슬이다. 술자리가 거나했을수록, 쇠고기가 달콤했을수록 기사 입력 자판에 닿는 손가락 깊이가 얕아질 수밖에 없으니까.”(P.58~59)

▲ 이은용 뉴스타파 객원기자가 지난 2일 서울 당산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이은용 뉴스타파 객원기자가 지난 2일 서울 당산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이 기자는 인터뷰에서도 “황우석 거짓 논문 사태가 시작됐을 시점부터 과학기술부를 출입하기 시작했다. 전자신문 과학기술팀 기자로서 황우석 말과 행동을 제대로 짚어서 보도했다면 그렇게 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우리 기자들이 제 역할을 못한 것이다. 당시 ‘황우석 비판’은 기자 몇몇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부끄럽지만 기록으로 남겨야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 같아 책에 세세하게 기록했다. 우리가 하지 못한 ‘황우석 검증’을 제대로 해준 MBC PD수첩에 아직도 고마움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예비 언론인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고 했다. 함께 침묵의 카르텔을 깨자는 독려였다. “올바르게 말하는 것, 정론을 추구하는 것이 기록하는 자의 사명인 것 같아요. 자기가 한 말엔 책임이 뒤따르지만 사회 비리와 비위를 밝혀야 한다는 사명. 권력자가 기자를 외면해도 기자가 짊어진 ‘시민의 알권리’는 외면할 수 없어요. 그런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침묵의 카르텔’이 도구로 기능했으면 좋겠어요. 이은용 기자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했구나, 참고할 수 있도록. 한국사회가 나에게 왜 기자라는 직업을 줬을까. 그런 소명 의식을 갖고 살다보면 한국사회를 맑게 울리는 목탁 역할을 하시지 않을까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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