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당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비판 보도를 4분 만에 삭제한 ‘조국 보도 참사’ 논란으로 편집국장 사퇴 요구가 나온 한겨레에 또 한번 편집국장 사퇴 성명이 나왔다.

한겨레 에디터석 편집기자 19명(이하 한겨레 편집팀)은 지난 3일 오후 “박용현 편집국장의 독단적 편집권을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전체 구성원들에게 메일로 전달했다.

▲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 사진=이치열 기자
▲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 사진=이치열 기자

한겨레 편집팀은 “독단적 편집권 행사에 항의하며 편집에디터가 보직을 사퇴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조국 사태’를 거치며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약속은 말뿐이었다. 한겨레 신뢰도 추락의 큰 부분이 국장의 독선적인 지면 제작 행태에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겨레 편집팀은 그동안 납득하지 못한 채 제목 등을 바꿔야 할 때 ‘자괴감’이 들었다고 주장했다. 편집팀은 “편집국 조직원으로서 국장의 지휘를 존중하며 직무에 임했다. 뉴스 가치 판단이 다를 땐 충분한 설명을 듣고자 했다. 제목을 바꿔야 할 땐 합당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편집회의 뒤 돌아온 대답은 때때로 합리적 설득이 아닌 일방적 지시였다”고 했다.

편집팀은 지난 1일자 신년호 기사 2개를 예로 들었다. 성명서를 보면 새해 기획 ‘노동자의 밥상’ 1면 기사는 1주일 전부터 지면을 잡은 편집자가 공들여 고민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국장 말 한마디에 제목과 레이아웃이 바뀌었다.

편집팀은 “기획면의 경우, 사전에 협의하고 조율해서 제작하기로 한 국장의 방침을 국장 스스로 무너뜨렸다. 국장 자신의 약속조차 손바닥 뒤집듯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이 상식적인 지면 제작을 위해 바람직한가. 결국 최선의 작품을 내놓기 위해 머리를 맞댄 시간이 물거품이 됐다”고 썼다.

또 편집팀은 2면 기사를 거론했다. 성명서를 보면 한겨레 법조팀장은 1월1일자 2면 조국 관련 기사 제목을 두고 편집위원 텔레그램방에서 문제 제기했다. 기사의 내용은 △검찰이 넉 달 넘게 조국 전 장관을 두고 과도한 수사를 했고 △조국 전 장관도 언론에서 제기한 의혹들을 두고 거짓 해명을 한 점을 지적했다. 검찰과 조국 전 장관 모두 비판하는 기사였던 것.

애초 법조팀과 편집팀은 “검, 유례없는 넉달 과도한 수사, 조국 거짓 해명 얽혀 여론 양극화”라고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이후 국장 지시로 “검, 유례없는 넉달 ‘먼지털기 수사’ “태산명동 서일필” “검 칼날 무뎌져””로 바뀌었다. 검찰과 조 전 장관 모두를 비판하는 게 아닌 검찰만 비판하는 뉘앙스의 내용을 다룬 기사처럼 제목이 달렸다.

▲ 1월1일자 2면 기사
▲ 1월1일자 2면 기사

편집팀은 “원래 제목은 국장의 강압적인 지시로 무참히 깨졌다. 기사에 충실한 제목을 뽑지 않고 어떤 잣대로 제목을 달아야 하는지 설명도 없었다. 주문대로 제목을 달아야 하는 것이 박용현 국장이 생각하는 편집자의 태도라면 우리는 단호히 거부한다”고 밝힌 뒤 “조국 사태를 거치며 위기를 헤쳐 나가길 바랐지만, 윤석열 별장 접대 보도로 또 한번 조직을 위기에 빠뜨렸다”고 비판했다.

끝으로 편집팀은 국장에게 세 가지를 요청했다. △박용현 편집국장은 한겨레의 신뢰 하락과 의사 결정 과정을 왜곡시킨 행위에 대해 책임지고 사과하고 △보직 사임할 사람은 편집에디터가 아닌 박용현 국장이고 △지면 제작이 정상을 되찾을 때까지 비상체제를 가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겨레지부(위원장 길윤형)도 지난 3일 “편집부는 지면을 제작하고 품질을 유지하는 편집국 내 ‘핵심 부서’다. 노조는 국장이 자신의 손발이 돼야 할 편집부 절대 다수 구성원에게 ‘비토’당한 이 사태를 매우 고통스럽게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이어 한겨레지부는 “노조는 대표이사와 국장은 편집국 대다수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낼 수 있는 신뢰를 이미 잃었다고 판단한다”며 “편집부 신뢰를 잃은 국장이 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박용현 국장은 결단을 내리는 게 본인과 조직을 위해 좋을 것”이라고 했다.

▲ 한겨레 기자들이 지난해 9월6일 오전 “박용현 편집국장 이하 국장단은 ‘조국 보도 참사’에 책임지고 당장 사퇴하라”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편집회의방과 국장실 등에 붙였다.
▲ 한겨레 기자들이 지난해 9월6일 오전 “박용현 편집국장 이하 국장단은 ‘조국 보도 참사’에 책임지고 당장 사퇴하라”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편집회의방과 국장실 등에 붙였다.

한겨레 내부에서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여러 말’이 나온다. 편집팀 성명서처럼 국장의 ‘소통’ 방식이 문제이니 국장이 결단을 내려 한다는 지적이 있다. 한겨레 소속 A기자는 “지난해 9월 있었던 ‘조국 사태’를 한겨레 안에서 되짚고 제대로 문제점 진단을 하지 않았다. 대안도 마련하지 못해 이어지는 문제들”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겨레 소속 B기자는 “‘조국 사태’를 내부에서 봉합하지 못한 결과가 ‘윤석열 별장 접대 보도’로 이어졌다. 국장이 사임할 시기를 놓쳤다. 실기(기회를 잃거나 놓침)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곧 있을 새 사장 선거를 앞두고 현 사장인 ‘양상우 대표이사 체제 흔들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겨레는 이달 사장 선거 후보자 등록을 마친 후, 오는 2월 새 사장 선거를 치른다. 한겨레 소속 C기자는 “사장 공모를 앞두고 ‘양파’(양상우 대표이사 세력)와 ‘반양파’ 간 세 대결로도 볼 수 있다. 현재 사장으로 나오겠다는 후보자가 3명으로 압축된다. 현 사장까지 공표하면 4명이다. 양 사장이 나올 것으로 여긴 세력들이 흔들려고 하는 것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한겨레 소속 D기자도 “편집부 기자들의 성명이 순수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시기상 사장 선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미디어오늘은 6일 박용현 국장에게 일련의 ‘편집국장 사퇴’ 목소리를 두고 어떤 입장인지 듣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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