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직장인의 73%가 올해 연차휴가를 다 못 썼다는 통계가 나왔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 3일 직장인 1451명을 조사한 결과 올해 연차휴가를 모두 사용했다고 답한 사람은 27%에 불과했다. 연차를 다 사용하지 못한 직장인의 61%는 연말까지 다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 답했다. 사원·대리급은 ‘상사와 동료 눈치가 보여서(41%·37%)’, 과장급 이상은 ‘일이 많아서(37%)’ 휴가를 다 못 썼다고 답했다.
잡코리아에서 지난 14일 발표한 게임전문 포털 게임잡 설문조사를 보면 게임업계에서 연차를 모두 사용한 직장인은 44.1%였다. 이들이 올해 연차를 다 사용하지 못한 이유로 ‘상사 등에 눈치가 보여서’를 꼽았다. 상급자들이 일을 놓지 않으니 하급자들이 덩달아 휴가를 못 쓴 것이다.
현재 제도상으론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연차사용을 장려하고 있다. 지난 19일 파이낸셜뉴스 기사 ‘연차계획 냈지만 출근해야되는 상황..“수당 못받고 일해요”’를 보면 연차사용촉진제도가 현장에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나온다.
1단계 연차사용 촉구, 2단계 사용시기 지정, 3단계 노무수령 거부 등 세 단계로 진행하는데 회사 인사팀에서 형식상 1~2단계를 진행하지만 실제 구성원들이 노무수령을 거부할 수 없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다. 기사에선 “사업주가 ‘일 하면 안 된다’는 식의 노무수령 거부를 표현해야 한다”는 고용노동부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상급자들이 실제로 자신과 하급자들을 위해 연차사용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 한 제도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에 노동존중을 내건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다음달인 지난 2017년 6월 말 “저는 연차휴가를 다 사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노동자의 충전과 안전을 위해 15일의 연차유급휴가를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하겠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적게 쉰 점을 언급하며 휴식이 노동효율성 뿐 아니라 경제활성화·고용창출에도 효과가 있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문 대통령의 ‘휴가예찬론’”이라며 대통령 취임 12일 만에 연차휴가를 사용한 사실, 대선 당시에 ““휴식이 곧 국가경쟁력이다. 여름 휴가 12일 이상을 의무화하고 기본 연차유급휴가일 수를 20일로 늘리는 것도 검토하겠다”고 말한 사실 등을 함께 보도했다. 문 대통령의 휴가는 한해 21일이다.
그러나 올해 문 대통령은 연차휴가를 5일 사용했다. 지난 2017년 5월 취임한 문 대통령은 2017년 총 14일 중 8일(57.1%)을 썼고, 지난해에는 21일 중 12일(57.1%)를 썼다. 올해는 23.8%로 가장 적게 연차를 썼다.
선거기간이나 국정 초에 했던 선언을 꼭 지키지 못할 순 있다. 그렇다면 충분하게 설명하겠다는 게 역시 대통령의 후보시절 일관된 태도였다. 사정이 있어서 연차를 다 소진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올해는 지난 두 해에 비해 급격히 연차소진이 떨어졌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국민일보에 “국내외 현안이 산적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보통 직장에서 상급자들도 일이 많아서, 나름대로 중요한 사정이 있어서 휴가를 다 쓰지 못하고 있다. 직장인 한명 한명을 만나면 자신들의 상급자가 ‘정말 바빠서 휴가를 쓰지 못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어느 직장에나 많다. 관행이 되고 사회 분위기로 굳어졌다. 그들의 동료와 하급자들까지 휴가를 다 쓰지 못하게 됐다. 그 결과 OECD에서 가장 길게 일하며 휴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라가 됐다. 누군가 자신에게 주어진 휴가를 쓰는 것도 눈치 보는 현상이 벌어졌다.
언론에서는 현 정부가 지나치게 노동시간을 단축하거나 친노동정책을 펴서 문제인 것처럼 비판하지만 실제 문 대통령은 휴가를 쓰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한 상급자가 돼 버렸다. 문 대통령은 올해 여름휴가를 반납했고, 모친상으로 5일의 조사휴가를 받았음에도 이를 다 소진하지 않았다. 일반 직장에서도 이런 상급자가 있으면 다른 직원들이 이를 의식할 텐데 국정 최고책임자가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어떤 파급효과를 미칠까. 개혁이 성공하려면 리더십을 얻어야 하는데, 그 리더십은 상황이 좋지 않을 때도 자신의 공약이나 사회적 원칙을 지키는 모습에서 쌓이기 마련이다.
올해 문 대통령이 연차의 23%만 소진한 일은 회사에서 형식상 연차소진촉진 행위를 하면서도 이를 실제 실현할 분위기나 조건을 만들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말로는 “휴식이 국가경쟁력”이라고 선언하며 “연차를 다 사용하겠다”고 했지만 몸이 정반대를 향한다면 그 말에 신뢰나 무게가 실릴 수 없다. 대통령의 행동은 그 자체로 중요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