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 기업으로부터 협찬금을 받기로 하고 기사를 삭제한 일을 공개하면서 언론계에 파장이 일고 있다.

관행을 고발한 ‘용기있는’ 문제제기이고, 자정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는 목소리도 있다. 반면 독립언론 가치를 내세운 경향신문마저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뼈아픈 현실을 보여줬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기자협회 경향신문 지회는 23일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성명을 냈다. 경향신문 1면과 22면에 실릴 예정이던 SPC 관련 기사가 삭제됐고, 그 배경에 협찬금 지급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삭제된 기사는 SPC가 운영하는 파리바게뜨 상표권이 중국 법원에서 무효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특히 경향신문 기자총회에서 공개한 이동현 사장과 홍아무개 기자 통화 내용을 보면 기사 거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영진과 편집권 독립이 무색하게 보이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동현 사장은 “‘(SPC그룹이)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길래 나는 거절의 의미로 ‘오억 바로 들고 오면 해준다케라’ 했거든 못한다 할 줄 알고. 아 그랬더니 문규(박문규 광고국장)가 바로 전화하디만 ‘오억 바로 한다캅니다’ 이러더라고”라고 말한다. 그러자 홍아무개 기자는 “한 열개 달라 하지 그러셨어요”라고 답한다. 이에 이 사장은 기사 쓴 사람의 기사 삭제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하자 이에 홍 기자는 ‘사장 지침에 따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장은 “니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 요즘 이렇게 (협찬금을) 내겠다는데도 없는데 수고 많았다. 병준(최병준 편집국장)이가 전화할 거다”라고 말한다.

홍 기자는 동료 기자와 통화에서 “빼겠다고 하는데 빼지 말라고 할 권한이 나한테 있나. 그 기사가 얼마나 좋은 기사인지를 입증해야 하는데 결국 상명하복을 택했다. 결국 양아치짓에 가담했다”고 토로했다.

경향신문 내부는 혼돈에 빠졌다. 사장과 편집국장, 광고국장의 직무를 중단시키고 인사위원회에서 징계를 검토하고, 차기 사장 선출 절차를 밟는다지만 수습이 여의치 않다.

경향신문 구성원 중에는 책임자 문책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공론화 과정이 섣불렀다는 주장도 나온다. 경향신문 한 기자는 사장이 기자협회 노조와 면담에서 잘못을 시인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녹취록이 내부에 공개돼 “결국 사장과 편집국장, 광고국장이 동시에 공석이 되는 언론사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며 “독립언론의 정체성을 훼손한 사람은 책임지고 물러나는 것이 맞지만 조직이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이렇게 급박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사실관계와 책임 문제를 분명히 한 입장을 신중하게 발표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 경항신문 CI
▲ 경항신문 CI

경향신문 구성원은 이번 사태를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조 지부장을 지낸 강진구 기자는 “적어도 경향신문 내부 구성원들은 광고주와 구체적인 대가를 전제로 기사와 광고를 맞바꾸는 편집권 침해만큼은 허용될 수도, 허용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왔다”며 “광고주로부터 거액의 협찬 광고 약속을 받고 기사를 1면에서 내린 것은 편집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자 경향신문이 넘지 말아야 할 레드라인을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다만 강 기자는 “전체의 대의가 광고주와 불편한 관계나 광고수익의 일정한 손해를 각오하더라도 일체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말라는 쪽으로 모인다면 경영진도 크게 고민하지 않을 것”이라며 “저를 비롯한 편집국 부장급 이상 간부들은 경영진에게 과연 이 정도의 결기를 모아줬는지, 아니면 거꾸로 경영진과 함께 현실 논리에 순응해 광고주와 일정한 타협이 습벽화돼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고 자성을 촉구했다.

언론노조 경향신문 지부 집행부는 이번 사태를 ‘편집권은 경향신문의 편집 방향과 독자의 알 권리에 반하는 경영 차원의 부당한 영리적 압력에 의하며 침해받지 않는다’고 규정한 단체협약 28조 3항의 위반이라고 했다. 지부는 경향신문 모든 조직이 참여하는 비상대책회의 구성을 논의 중이다.

정연우 교수(세명대 광고홍보학과)는 “경향신문 사태를 보면 그래도 희망을 갖는다. 다른 언론사 같으면 이렇게 공개하고 문제 삼지 못했을 것”이라며 “곳곳에서 돈 받고 기사 써주고, 기사 빼는 작태가 만연해 있다. 자정 노력은커녕 문제의식조차 없다. 편집권을 침해하는 지시에 아무런 저항 없이 묵묵히 움직이는 기자들 스스로 뒤를 돌아보고 정체성을 환기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출신인 박영흠 교수(협성대)는 “긍정적인 측면은 경향신문 기자들이 내부 토론과 문제제기로 해결 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영진 감시나 언론인으로서 내적 긴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면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독자에게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징계 과정 등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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