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이슈 관련된 글을 SNS에서 ‘리트윗’(RT)했다는 이유 만으로 메갈, 꼴페미, 남성혐오자라는 조롱을 받고 반사회적 인물로 낙인 찍혔다. 그 의견을 회사가 받아들여 계약을 해지하고 수많은 노력을 들인 창작물은 생명을 틔우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일이 중단되고 작업물이 삭제됐다. 이런 회사의 결정은 악플러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악플러들이 활개치도록 했다.” (게임업계 종사자 A씨)

2016년 넥슨이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 사진을 올린 성우 김자연씨를 퇴출시킨 지 3년, 최소 16건 이상의 ‘사상검증’ 사례가 파악됐다. △2016년 7월 나이스게임TV 캐스터가 넥슨 성우 교체 등을 SNS에서 비판한 뒤 방송 하차 및 퇴사 △2016년 11월 SNS상 페미니즘 글 리트윗한 작가가 참여한 ‘데스티니 차일드’ 일러스트 교체 △2018년 3월 SNS 페미니즘 게시글 리트윗한 ‘소녀전선’ 일러스트레이터의 일러스트 추가 ‘무기한 연기’ △2018년 3월 SNS상 페미니즘 글 작성한 ‘섬광천사 리토나 리리셰’ 보컬 작업물 회수·삭제 △2019년 ‘아르카나택틱스’의 “문제 작가 리스트” 논란 등이다. 한 사례당 여러 명의 피해자가 존재하거나, 게임업계 특성상 대중에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피해자 규모는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피해자인 A씨는 23일 서울 여성·청년·노동단체 기자회견에서 입장문을 통해 “두려움 없이 일하고 싶다.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방송인들은 음주운전을 하거나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면 방송계 활동이 정지된다. 저는 SNS에서 ‘좋아요’, ‘리트윗’을 눌렀다는 이유 만으로 그들과 동일한 처분을 당하고 있다. 기억도 못할만큼 오래 전 리트윗 한 글조차 확대해석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여전히 두려움 속에 웅크리고 있다”며 “날이 갈수록 저와 같은 피해자가 늘어나고 사상검증은 ‘악플러들의 문화’가 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A씨는 “저는 어디서도 억울함을 이야기할 수 없고 약속된 대금을 받지 못해 생존 위협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 일할 수 없어 해외업체를 찾아다녀야 한다”며 “게임업계는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 2016~2019 게임업계 ‘사상검증’ 일지. 출처=전국여성노동조합 자료 재구성/디자인=안혜나 기자
▲ 2016~2019 게임업계 ‘사상검증’ 일지. 출처=전국여성노동조합 자료 재구성/디자인=안혜나 기자

게임업계에서는 이른바 ‘사상검증’이 체계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넥슨은 디자인 직군 면접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일하는 노동자 중 골라내는 행위로 모자라 사전에 진입조차 못하도록 차단하겠다는 거다. 티키타카스튜디오는 ‘외주검수팀을 꾸려 철저히 검증하겠다’고 입장문을 냈다가 반발이 이어지니 번복했다”고 전한 뒤 “페미니즘은 이미 시대정신이고 세상은 바뀌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저들이 하는 행위는 명백한 불법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개 시민단체들은 이날 “‘불링’(bullying·약자에 대한 괴롭힘) 공범이자 사상검증 가해집단인 게임업계가 인권탄압행위 이유로 ‘고객인 남성 유저의 의견 수용’을 드는 것은 비겁하고 치졸한 처사이며 인권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라 주장했다.

‘사상검증’으로 칭해지는 업무배제 행위는 헌법에 위배될 뿐 아니라 현행법이 보장하는 ‘저작인격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발언한 것을 기업에서 사과·철회하라 요구하고, 의사표현 만으로 직업적 불이익을 주고 업계에서 매장한 것은 헌법 제19조(양심의 자유)에 위배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기업 측이 저작자들의 저작물을 내리거나 ‘포트폴리오’ 게시를 차단한 것은 저작자가 저작물에 대해 갖는 ‘저작인격권’을 침해한다는 해석도 있다. 웹툰작가·일러스트레이터 직군의 경우 ‘꾸준한 자기 PR’이 중요하며 포트폴리오를 통해 후속 의뢰가 이뤄지는데, 이를 막는 것은 일체의 홍보·개인광고를 차단하는 치명적 행위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전한다.

▲ 지난 2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불공정행위 신고에 대해 밝힌 권고 내용.
▲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11월1일 신고건에 대해 지난 2월 권고한 내용 일부.

한국콘텐츠진흥원도 지난 2월 사상검증 피해와 관련한 ‘예술창작활동 방해행위’ 신고 건에 대해 “일러스트레이터의 성향 등을 이유로 용역계약체결을 거부하거나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와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안을 낸 바 있다. 그러나 집행강제력이 없다는 한계로 인해 실효적 대안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난해 11월 콘진원에 신고를 접수했던 피해자 6인이 같은 시기 국가인권위원회에도 진정을 제기해, 향후 인권위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관심이다.

게임업계 출신인 류호정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연맹 홍보부장은 이날 “제가 본 피해자들은 모두 비정규직이거나 프리랜서였다. 쉽게 쓰고 쉽게 버려지는 사람들이 그때도 버려졌다. 계급에 따라 사상의 자유가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며 “게임업계는 개발이 중단되면 정규직도 쉽게 권고사직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사상검증으로 생계를 위협받는 것도 더 쉽다. 이번엔 여성노동자이지만 다음엔 (대상이) 누구일지 알 수 없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마주하고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할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 2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인근에서 여성, 청년, 노동인권 단체들이 '게임업계 사상검증과 블랙리스트 규탄 및 피해복구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사진=노지민 기자
▲ 2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인근에서 여성, 청년, 노동인권 단체들이 '게임업계 사상검증과 블랙리스트 규탄 및 피해복구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사진=노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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