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재정립할 판결에 조선일보는 ‘좌파사관’ 타령
‘표현의 자유’ 재정립할 판결에 조선일보는 ‘좌파사관’ 타령
[민언련 신문 모니터]

대법원은 지난달 21일, 시민단체가 제작한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2013년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가 내렸던 법정제재는 위법하다고 최종 판결했습니다. 이번 판결은 현행 방송 공정성 심의제도를 개혁할 필요성과 더불어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를 재정립할 계기가 마련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대법원은 현행 심의제도가 정치 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급변한 미디어 환경을 반영하지 못한 공정성 조항으로 방송의 실질적인 균형성을 판단하지 못할 것이라 우려했습니다. 그러한 제도 때문에 2013년, <백년전쟁>에 부당한 제재가 결정됐다는 겁니다. 대법관 단 1명 차이로 판결이 결정됐다는 점에서 그러한 쟁점이 현재도 치열한 토론의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론 자유의 또 다른 당사자인 조선일본는 그러한 의미와 가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전히 반공 군사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는 ‘백년전쟁’이 이승만‧박정희를 뭐라고 욕했는지에 분노하며 비난을 퍼붓기에 바쁜 모양새입니다. 

조선일보는 판결 직후인 22일부터 29일까지 7건의 보도를 냈는데(지면 기준) 모두 대법원 판결을 ‘좌파 사관’이라고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이승만·박정희 비방다큐 ‘백년전쟁’…김명수 사법부의 면죄부, 1·2심의 제재 판결 대법원이 뒤집었다>, <정권 정치 기구 된 대법원과 교육청>, <이승만은 악질 친일파, 박정희는 스네이크박 친일인명사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 제작>, <백년전쟁 문제없다 대법관 7명 중 6명 문정부서 임명>(11월22일), <만물상-백년전쟁과 대법원>(11월23일), <백년전쟁 판결, 독이 든 사관을 대법원이 인정해준 것>(11월26일), <고 김일영 교수, 한국 현대사를 건국과 부국의 역사로 규명해 좌파 사관 극복>(11월28일) 등 제목만 봐도 대법원이 문재인 정권의 기구로 전략했다거나 잘못된 좌파 사관을 인정했다는 적나라한 공세가 나타납니다. 

이승만‧박정희에 대한 조선일보의 순애보가 두 눈을 가렸다

재판의 발단이 된 2013년 방통심의위 심의 당시 새누리당 측 위원들은 이승만‧박정희 두 역사적 인물에 대한 다양한 평가, <백년전쟁>이 제시한 여러 사료 등 근거와 관련 없이 정치적 비난을 퍼부은 바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조선일보 <‘백년전쟁’ 판결, 독이 든 史觀을 대법원이 인정해준 것>(11월26일)은 박근혜 정부 당시 이른바 ‘뉴라이트 학자’로서 KBS 이사장까지 역임했던 이인호 씨를 인터뷰했는데 이 씨의 주장을 제목으로 인용하면서 따옴표 처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독이 든 사관”이라는 한 개인의 판단을 마치 사실처럼 적시한 셈입니다. <만물상-백년전쟁과 대법원>(11월23일)은 “좌파 단체가 만든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은 오로지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욕보이고 조롱하려고 제작한 영상물”, “‘백년전쟁’이 대한민국 역사를 능멸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그들의 조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년전쟁’은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 등 원색적인 비난, 케케묵은 색깔론으로 일관했습니다. <‘백년전쟁 판결’ 뒤집은 대법관 7명 중 6명, 文정부서 임명>(11월21일)의 경우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진보로 기운 대법원의 성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판결이라는 평가”를 내세워 대법원 역시 이념으로 재단했는데, 어째서 ‘진보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안철상‧이동원 대법관은 ‘백년전쟁’ 제재가 정당하다며 소수의견으로 갔는지, 어째서 ‘보수 박근혜 정부’가 임명한 김재형 대법관은 제재가 부당하다고 강하게 비판했는지는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 지난 11월23일 조선일보 오피니언면에 실린 ‘만물상-백년전쟁과 대법원’
▲ 지난 11월23일 조선일보 오피니언면에 실린 ‘만물상-백년전쟁과 대법원’

 

대통령 바뀌어서 나라가 흔들린다? 부실한 심의로 TV조선만 구제됐다

가장 황당한 보도는 인터넷판 보도인 조선일보 <김광일의 입-박근혜·문재인, 둘은 전쟁 중이다>(11월22일)입니다. 얼마 전까지 TV조선의 <신통방통>을 진행했던 김광일 논설위원은 “대통령이 바뀌면서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급격 인상, 주52시간제 강행, 탈원전 정책, 굴욕적 친북 안보정책, 이런 것들 때문에 고통 받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대하게, 대한민국과 국민들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는 전·현직 대통령의 전쟁이 대법원을 무대로 벌어지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표현의 자유를 논한 대법 판결에 경제정책들을 언급하는 대목부터 이미 합리성을 잃었습니다. 전현직 대통령이 대법원에서 전쟁을 벌인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체성을 뿌리부터 뒤흔든다’는 것으로 묘사한 일장연설은 실소를 머금게 합니다. 삼권분립이 확립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법원이 대통령들의 전쟁터가 될 수 있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습니다. 

조선일보가 은근슬쩍 누락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좌파 사관’을 용인하도록 만들어 전직 대통령과 법원에서 싸우고 있는 바로 그 대통령의 정부 하에서도 방송 심의제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언론이 조선일보의 종편 TV조선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대법 판결이 명백히 확인한 현행 심의제도의 불공정성을 반증합니다. 김광일 씨가 진행했던 TV조선 <신통방통>은 지난해 11월 “오산 미군기지 앞 아파트에 고정간첩이 있다. 근거는 없다”는 초유의 시사 대담을 내놓고도 방통심의위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근거를 제시했던 <백년전쟁>에 ‘관계자 징계 및 경고’라는 중징계를 내렸던 방통심의위가 TV조선의 근거도 없는 거짓말에는 면죄부를 준 셈입니다. 3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지난해 9월 TV조선 <보도본부 핫라인>은 “힘이 없고 돈이 없어서 미국의 도움, 친일파 청산을 못 하고 대한민국을 세웠던 이승만 대통령”, “김정은을 두고는 후한 평가를 하면서 이승만·박정희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박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문재인 대통령을 비난했는데, 바로 그 문재인 정부의 방통심의위는 아무런 강제력이 없는 ‘행정지도’(권고)만 의결했습니다. 대통령이 바뀌어서 대한민국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조선일보 주장대로라면 TV조선은 <백년전쟁>이 받았던 중징계보다 훨씬 큰 대가를 치렀어야 합니다.

독재 시절이 그리운 조선일보, 현실로 돌아와야

사안의 핵심, 사태의 본질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반공주의 이념에 매몰되면 이렇게 설득력이 없고 구호만 남는 기사가 나오는 겁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대통령이 바뀌어서 좌파 사관이 법적으로 인정됐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선일보가 꿈에서나 그리는 이승만‧박정희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고백에 가깝습니다. 여전히 그러한 이념적 이분법, 색깔론, 반공주의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늘 조선일보가 언론개혁 대상으로 지목되는 건 아닐까요? 대법 판결로 우리가 논의를 시작해야하는 대상은 시민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미디어 콘텐츠의 합리성‧객관성을 누가 판단할 것인가, 그 심의기관의 정치적 독립성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근거 없는 날조와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는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등 미디어 영역 전반에 걸친 규제체계에 대한 고민입니다. 대법관 딱 1명 차이로 대법원이 확정한 것은 합리성을 갖춘 시민의 콘텐츠를 정치적으로 오염된 국가기관이 자의적인 공정성 기준으로 심의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입니다. 이 근소한 차이로 하여금 우리 사회 공론장의 민주성을 확장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 등 유관기관과 시민사회, 언론계가 모두 나서서 공식적 논의기구 출범 등 실질적 행동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조선일보도 그 일원으로서 함께 하고 싶다면 늦지 않게 반공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 문의 : 이봉우 정책팀장 (02) 392-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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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2019-12-11 15:46:33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