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이 보이는 조선호텔 창가에서 한 중년 신사가 서울의 이른 아침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중대 임무를 띠고 잠입한 그는 22년 전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을 침공해 폐허로 만들었다. 신사가 들었는 조선호텔 1814호실은 귀빈용 특실이었다. 신사는 미국 부통령이 묵고 간 뒤 처음 이 방에 투숙한 귀빈이었다. 룸메이드 구춘자씨는 신사의 방을 노크하고 들어섰다. 구씨는 꽁초 끝에 찍힌 담배의 이름을 읽고 깜짝 놀랐다. 말만 들은 북한 담배 ‘영광’이었다. 

그날 밤 정부 인사들이 극비리에 차량을 몰고 그를 찾아왔다. 신사를 태운 링컨콘티넨탈은 1972년 5월30일 저녁 서울 종로구 익선동의 고급 요정 오진암 앞에서 멈췄다. 10여명의 손님이 전체를 독점한 요정은 경비가 삼엄했다. 조리사 17명 중 11명은 궁중음식 기능보유자로 무형문화재 38호인 황혜성 여사와 그의 제자들이었다. 밀실 앞에 이르면 버선의 선처럼 아름다운 기생들이 상을 받아 들었다. 얼마 안돼 밀실에서는 방아타령 선율이 흘러나왔다. 흐느끼는 허스키는 가수 이미자 목소리 같았다. 황 여사는 존슨 대통령, 뤼브케 독일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도 음식을 장만하고 조리사들을 지휘했다. 

1개월 뒤 1972년 7월4일 10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발표를 듣고 황 여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날의 주빈이 평양의 밀사로 서울에 왔던 북한 총리 박성철이었다. 그는 1950년에도 인민군 15사단장으로 서울 침공에 앞장 선 인물이었다. 

▲ 1972년 10월12일 오전 10시,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첫 회의가 열렸다.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100일만에 처음으로 열린 회의는 공동성명 이후의 남북한의 제문제를 협의했다. 12일 오후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계속된 첫회담에서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합의사항을 성실이 이행함으로써 남북간의 오해와 불신을 풀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발표문을 발표했다. 4시간25분간의 회담을 마치고 자유의집 앞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 북한 부수상이 악수했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1972년 10월12일 오전 10시,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첫 회의가 열렸다.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100일만에 처음으로 열린 회의는 공동성명 이후의 남북한의 제문제를 협의했다. 12일 오후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계속된 첫회담에서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합의사항을 성실이 이행함으로써 남북간의 오해와 불신을 풀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발표문을 발표했다. 4시간25분간의 회담을 마치고 자유의집 앞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 북한 부수상이 악수했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은 이렇게 도무지 화해할 수 없어 보였던 두 세계의 만남이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다시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요정 오진암은 호텔로 변신해 요즘 한층 뜨는 동네 ‘익선동’의 터주대감처럼 버티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은 이렇게 1970년대 초부터 화해 분위기로 옮겨갔다. 한반도도 이런 도도한 물결을 거스를 순 없었다. 

한반도 긴장이 화해 분위기로 옮겨가면 우리 정부로선 재정 여력도 생기고 인근 국가와 동맹국과 불필요한 마찰도 줄어든다. 

5배로 올려달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막무가내식 방위비 협상 카드를 접하고도 여러 언론이 ‘안보팔이’를 새삼 재개했다. 주한 미 대사의 형편없는 언론 플레이도 접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30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에서 열린 장병 격려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30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에서 열린 장병 격려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주한 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하면 큰 일 날 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주한 미군 감축은 여러 차례 진행됐다. 미국의 핵우산을 쓰고 있다가 벗어나기도 했다. 그래도 한반도엔 아무 일도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주둔했던 미군을 처음 감축한 건 1970년 10월이었다. 당시 경기지역 현장을 취재했던 한 기자는 “도시가 붕괴하는 걸 목격했다”고 썼다. 기사 곳곳에 불안과 공포가 깊이 묻어 났다. 미군 부대 캠프 카이저가 있던 “경기도 운천은 양키들의 전시 달러로 세워진 군표 누각이었다. 캠프 카이저는 미군 철수 1호 부대다. 양키들의 수송 트럭이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진 뒤 폐허가 됐다”고 썼다. 

한창 때는 하룻밤에 맥주 100상자를 소비했던 환락은 가고 나이트클럽과 카바레는 출입문에 못질을 했다. 950명의 한국인 부대 종업원도 한꺼번에 실업자가 되고 들끓었던 600여 명의 술집 종업원들은 쑥고개(평택)와 동두천, 용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베트남 전쟁에 올인했던 미국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국내 언론은 연일 죽는 소리를 냈다. 이후에도 몇 차례 미군 감축이 있었지만 이 땅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측 방위비 협상대표가 이 점을 꼭 새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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