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삼시 세끼 안성탕면만 먹는 것으로 알려지며 화제가 되었던 박병구 할아버지(91세). 농심은 박씨가 1972년 ‘장협착증’이란 질환을 앓게 됐고, 그 뒤부터 48년째 라면만 먹기 시작했으며 “박 할아버지는 여전히 안성탕면 외 다른 식사나 간식은 먹지 않고, 하루 세끼 안성탕면만 고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다수 언론이 이 대목에 주목했다. 삼시 세끼 라면만 고집하면서도 90세를 넘겼다니! 

그가 정말 라면만 먹을까. 의문을 품을 새 없이 수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대부분 5월7일자 농심의 보도자료를 베낀 기사였다. 농심은 이날 “어버이날을 앞두고 박 할아버지 댁을 방문해 건강을 기원하는 선물을 전했다”고 전하며 1994년부터 지금까지 26년째 안성탕면을 무상 제공하며 각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고 선전했다. 

농심은 “1994년 당시 이장이었던 정화만씨의 제보로 박 할아버지의 소식을 처음 듣게 됐다. 할아버지의 사연은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고, 농심은 할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안성탕면을 무상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 이후로 농심이 제공한 안성탕면은 총 900여 박스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농심의 선전은 안성탕면이 맛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먹어도 장수하는데 문제없는 건강식품이라는 광고효과를 낳았다.

▲박병구 할아버지(91세). ⓒ농심
▲박병구 할아버지(91세). ⓒ농심

이후 한국경제TV는 지난 5월31일 유튜브채널 ‘TMI특공대’에 박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담은 영상을 게시했다. 한국경제TV는 “안성탕면의 된장·콩 성분이 할아버지 같은 목양체질, 목음체질에게 적합한 음식”이라고 설명했다. 농심 스프개발팀 과장은 해당 방송에서 “된장을 조금 더 구수하고 진하게 맛을 내는 그런 공정을 따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다”며 안성탕면의 ‘특별한 비밀’을 소개했다. 영상 조회 수는 92만 회, 16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안성탕면 사러 갑니다 불로장생의 묘약”, “이제는 안성탕면이닷 가즈아~~~”, “웬만한 연예인보다 광고효과 엄청나다 이분 때문에 안성탕면 3봉 사 먹었다”와 같은 댓글이 눈에 띄었다. 

정말 라면만 드실까. 할아버지는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에 거주한다. 화천군청에 전화했다. 화천군청 관계자는 “이런 전화를 여러 번 받았는데 어르신이 인터뷰를 모두 거절하고 있다”고 말한 뒤 “지금 안성탕면만 드시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며 할아버지가 사는 마을 이장의 번호를 알려줬다. 그 뒤 ‘조국 사태’가 터지며 잠시 잊고 있다가 몇 개월이 지나서야 광덕리 이장 이아무개씨와 통화했다. 지금도 삼시 세끼 안성탕면을 드시는지 물어봤다. 

“안 그래요 지금은. 체질도 바뀌시고 그래서 식사도 하고 그러세요. 안성탕면만 드시는 거 아니에요.” 밥도 드시는지 물어봤다. “그럼요. 옛날에 했던 거 자꾸 기사화시켜서 그랬던 거에요.” 네이버에 검색되는 박병구 할아버지의 라면사랑은 2005년에 첫 기사가 등장한다. 지금은 이것저것 드신다는 거냐고 물어봤다. “아직까지는 라면을 많이 드신다는 거에요.” 이아무개씨는 “2019년 5월 당시에도 라면만 드셨던 건 아닌걸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병구 할아버지와 아내 최정숙(77) 할머니와 통화하고 싶었지만 연결이 어려웠다. “그분들 지금 하도 (언론에) 시달려서 다른 분들 안 만나요. 아주머니가 짜증 내요. (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셔서 잘 듣지도 못해요.” 두 분을 괴롭혔던 기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어르신에게 직접 여쭤보지는 못했다. 다만 농심이 보도자료에 ‘조미료’를 많이 쳤던 것으로 추정해볼 뿐이다. 

농심은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르게 보도자료를 배포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농심 홍보팀 관계자는 “할머니와 통화했더니 쌀밥은 지금도 소화를 못 시킨다고 하신다. 가끔 죽을 드리는 정도라고 하고 여전히 라면을 주로 드신다고 한다”고 밝혔으며 “떡을 드신 적도 있다고 하던데 전체 보도자료 취지에 벗어날 정도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해당 관계자는 무엇보다 “어르신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진정성이 있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마을 이장에 따르면 박병구 할아버지는 이제 거의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화천군청 독거노인관리 담당자에 따르면 박병구 할아버지와 최정숙 할머니로부터 특별한 복지 요청은 없는 상태다. 담당자는 “두 분은 기초연금만 수령하고 있으며, 할머니께서 요양등급 신청도 하지 않으신 상태”라고 전하며 “할아버지 귀가 심각하게 들리지 않는 것만 제외하면 건강상으로 특별한 문제는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박병구 할아버지 관련된 기사는 이전에도 있었다. ‘하루 세끼 라면만 41년…84세 농심맨’(연합뉴스 2013년 6월19일), ‘라면 할아버지 박병구씨 “32년째 이것만 먹고 살았어”’(세계일보 2005년 11월17일)와 같은 기사가 검색되는 것을 보면 박 할아버지가 보통 사람보다 라면을 즐겨 드셨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할아버지댁에서 삼시 세끼 관찰하지 않는 한 실제 뭘 드시는지는 농심도, 본지 기자도 마을 이장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지금 그런 작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농심이 보도자료로 냈고, 언론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베껴 썼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농심은 ‘몸에 좋은 라면’이라는 엄청난 홍보 효과를 거뒀지만, 박 할아버지 가족은 언론에 시달리며 원치 않은 유명세를 타야 했다. 농심이 할아버지께 건넨 라면 박스의 ‘선의’까지 곡해할 생각은 없다. 다만 라면을 드리되 보도자료를 내지 않았다면 그 ‘선의’가 더 빛났을 것이다. 

농심 홍보팀 관계자는 “다른 식사를 한다는 의심을 한 적이 없다. 다른 분들에게 탐문할 이유도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어쩌면 박병구 할아버지가 삼시 세끼 라면만 드신다고 믿었던 사람은 처음부터 거의 없었을지 모른다. 화제성과 선정성을 원하는 언론과 저비용 고효율의 선전 효과를 노린 기업의 이해가 겹쳐, 모두가 진실을 찾아 나설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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