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머니’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담겨 있습니다.

지난 11월 13일 개봉한 정지영 감독의 신작 영화 ‘블랙머니’는 여러모로 독특한 위치에 서있는 작품이다. 빠르게 트렌드가 바뀌는 작업 환경에서 20년 이상 이름을 올린 영화 감독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19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한 이후 30년 이상 영화 연출자로 활약하는 정지영 감독이 2012년 ‘남영동 1985’ 이후 8년 만의 신작이라는 의미가 있다. 동시에 ‘블랙머니’에는 정지영 감독이 꾸준히 ‘사회고발 영화’를 만들려 하는 의지가 담긴 작품이라는 의의가 존재한다.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가 심하던 시절인 1990년 온갖 사회적 공격을 감수하고 한국 전쟁 시기의 빨치산 전쟁을 드러낸 ‘남부군’을 비롯하여 한국 상업 영화 최초로 비판적인 시선으로 베트남 전쟁을 들여다 본 1992년작 ‘하얀 전쟁’, 긴 휴식을 마치고 돌아와 ‘판사 석궁 공격 사건’을 다룬 2011년작 ‘부러진 화살’, 악명높은 고문 기술인으로 유명했던 이근안이 민주화운동가 김근태를 고문했던 실화를 소재로 삼은 2012년작 ‘남영동 1985’에 이어 정지영은 지속적으로 사회를 뒤흔든 사건을 자신의 영화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블랙머니’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결국 이 영화의 소재일 것이다. 바로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이다. 아직 IMF 경제위기의 여파가 채가시지 않은 2003년, 자본 부실 상태에 놓여 있던 외환은행을 미국 사모펀드인 ‘론스타’(Lone Star Funds)가 인수하게 되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 은행도 외환은행의 인수를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안도의 손길이었지만, 인수를 전후하여 론스타 인수의 적법성 논란이 일었다. 당시 은행법은 해외의 ‘은행’이거나 국내 금융회사와 합작한 해외 자본에게만 은행의 인수 자격을 주었다. 론스타는 엄연히 ‘사모펀드’였을 뿐 ‘은행’이 아니었지만, 공적자금 회수에 급급했던 정부는 ‘BIS 비율(은행의 자기자본비율) 8% 이하인 은행 인수 시’에는 해당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예외 규정을 인용하는 등 온갖 무리수 끝에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허용했다. 이후 가까스로 외환은행은 부도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론스타가 외환은행 매각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려 시도하면서 문제는 다시 불붙게 되었다. 2012년 외환은행은 최종적으로 하나은행에 매각되었지만, 이후 론스타는 한국 정부를 ‘부당한 조치로 원하던 가격에 매각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유로 5조원 규모의 국제소송을 제기해 여전히 소송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

외환은행을 해외 자본이 인수하고, 이를 다시 매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특히 정부가 이러한 과정을 사실상 용인했다는 점에서 큰 지탄을 받을 수밖에는 없었다. 물론 외환은행을 국내외 어떤 은행도 인수하고 싶지 않아했다는 정황이 있지만, 정부가 스스로 온갖 무리수를 두면서 이렇다 할 인수 자격도 없는 해외 사모펀드에 한국의 대형 은행을 인수하고 다시 사모펀드가 다른 자본에 은행을 매각하면서 큰 차익을 얻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인 현실이었다.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금융 사건에 자연스레 ‘영화로 이 사건을 다루자’는 논의가 일게 되었다. 지난 2018년 5월, ‘해방자’를 뜻하는 순우리말 ‘질라라비’라는 이름으로 김종철 자유언론재단 이사장,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공동위원장이 된 ‘론스타 먹튀사건 영화제작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총 50억 규모의 제작비를 국민주 모금 형식으로 모으겠다는 목표로 제작 계획이 발표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신생 영화 투자배급사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의 투자금이 더해진 형태로 영화는 완성되었다.

영화 개봉 이후 약 2주가 지난 상황에서 ‘블랙머니’는 분명 화제를 모으는 것에 성공했다. 개봉 12일만인 11월 25일 손익분기점 177만명을 돌파했고, 11월 29일 현재에는 약 208만명의 관객이 영화를 관람한 상황이다. 디즈니의 대형 신작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2’가 개봉하며 흥행세는 약간 주춤해졌지만, ‘론스타 의혹’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고스란히 영화 ‘블랙머니’로 이어졌다 봐도 과언이 아닌 모습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내부적인 모습까지도 ‘론스타 의혹’을 충실하게 다뤄내고 있을까. 결연한 시선으로 금융 비리를 다뤄내겠다며 선언하면 영화의 홍보와 다르게, 영화의 내부는 너무나도 엉성한 골조 위에 놓여 있다. “경제 공부가 되었으면 한다”는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정지영 감독의 인터뷰와 달리, 영화에서는 실제 ‘론스타 의혹’이 놓여 있는 구체적인 정보를 모두 잘라낸채 자극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에 천착해있다. 정관계의 기득권층과 소위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 불리는 한국계 외국인, 그리고 해외 자본의 합심으로 제 값에 팔 수 있었던 외환은행을 헐값에 팔았다는 의혹만을 계속 부풀릴 뿐이다. 정부는 어떻게든 외환은행에 투여한 공적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국내외 은행들을 통해 외환은행을 빠르게 매각하고자 시도했지만, 당시의 세계 경제는 물론 외환은행의 부실한 재정 상황이 겹쳐지면서 결코 쉽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드러나있지 않은 채 '70조 은행'이라는 숫자만 강조할 뿐이다. 상세한 정황에 대한 설명이나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한국 은행이 해외 자본에게 팔렸다’는 자극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이렇다 할 내용이 담겨 있지 않은 상황에서 배우 조진웅이 맡은 주인공 ‘양민혁 검사’ 등의 수사 장면도 함께 부실해지긴 매한가지이다.

대신 골조가 텅 빈 자리에 메우는 요소는 ‘음모론’이다. 실제로 외환은행 매각에 어떠한 무리수와 문제가 있었는지를 영화적 서사와 연출로 드러내는 대신, 한눈에 보기에도 음흉해보이고 뒤가 구린 인물들의 회합 몇 번으로 모든 설명을 대체한다. 아무리 극적인 요소라 이해하고 싶어도, 작중에서 몇 차례나 반복해서 ‘사건 관계자를 대형 트럭이 들이받아 죽이려 한다’는 설정의 사용은 작위적이기 이전에 게으르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이와 함께 철저하게 등장인물들을 ‘선인’과 ‘악인’으로 나누는 연출은 사건에 대한 접근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론스타 의혹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으나 이후 오히려 론스타로부터 뇌물을 수수받아 충격을 준 장화식 전 투기자본감시센터 대표의 금품 수수 사건도 영화에 등장하지만 ‘기득권의 음모’로 묘사되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넘어간다. 주인공 ‘양민혁 검사’가 사건 초반에 휘말린 ‘피의자 성추행 사건 누명’을 썼다는 설정 역시 한동안 크게 불거졌던 ‘미투 운동’을 ‘악인의 음모’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오용 이상을 넘지 못할 따름이다.

▲ 영화 ‘블랙머니’ 한 장면.
▲ 영화 ‘블랙머니’ 한 장면.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가 철저한 이분법과 음모론에만 갇힌 상황에서 배우들 역시 매우 제약적인 모습을 보인다. 조진웅을 비롯한 주연 배우를 비롯하여 조연 배우들의 면모는 화려하지만, 모두 평면적인 연기에 머물러 있다. 처음부터 착하게 설정된 이는 계속 착하게만, 나쁜 캐릭터로 구축된 캐릭터는 계속 나쁘게 그려진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이 철저히 굳어진 연출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개되다 보니 영화의 극적인 요소 역시 함께 밋밋해진다. 국제통상전문변호사 ‘김나리’ 역을 맡은 배우 이하늬 정도만이 선과 악의 경계선 상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입체적인 면모를 보일 뿐이다.

이러한 연출적인 아쉬움은 2018년에 개봉하여 IMF 경제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의 막전막후를 그린 ‘국가부도의 날’은 물론, 2010년대 이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경제 위기’를 그린 해외 작품들과 비교해도 더욱 두드러진다. ‘국가부도의 날’ 역시 IMF 경제 위기를 몇몇 관료의 부도덕한 탐욕 수준으로 그치는 한계가 있었지만, 몰락 직전에 놓인 다양한 인물들의 군상을 복합적으로 그려내면서 최소한 ‘블랙머니’ 보다는 깊이 있는 자세로 경제 문제의 실상을 접근하려 노력한 측면은 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본격적으로 위기에 놓이기 전 오히려 이득을 챙긴 이들의 모습을 그린 ‘마진콜 : 24시간 조작된 진실’이나 ‘빅쇼트’ 등의 작품은 한정된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탐욕으로 빠지기 쉬운 자본주의의 현실을 적절한 연출적인 효과로 짚어내며 할리우드는 물론 국내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이들 작품과 비교하면 ‘블랙머니’는 론스타에 제기된 의혹을 다시 관객들에게 환기시킨 공이 있을지는 몰라도, 문제를 적절한 수준으로 알리는 것에는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평을 내릴 수밖에는 없다.

설상가상으로 ‘블랙머니’는 영화가 배급되는 차원에서도 한계를 드러냈다. 2012년 ‘남영동 1985’의 개봉을 앞두고 멀티플렉스가 일부 영화에만 작품을 밀어주는 것에 정지영 감독은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었다. 그러나 정작 ‘블랙머니’는 ‘겨울왕국 2’가 본격적으로 개봉하기 전까지 최고 상영점유율 28.7%, 좌석점유율 33.9%를 차지하는 등 사실상 전국에 있는 극장의 1/3을 싹쓸이하는 움직임을 드러냈다. 정지영 감독이 일찌감치 스크린쿼터 운동에 나선 것은 물론, ‘블랙머니’의 제작자로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의 양기환 이사장이 참여한 것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씁쓸한 행보일 수는 없었다.

이후 디즈니가 배급한 ‘겨울왕국 2’가 최고 2,648개 스크린, 상영점유율 73.9%를 차지하며 무소불위로 한국 극장가를 차지하자 정지영 감독은 이전부터 참여하던 연대단체인 ‘반독과점 영대위’와 함께 ‘스크린 독과점 반대’의 목소리를 외쳤다. 분명 ‘겨울왕국 2’가 스크린을 확보하는 모습은 ‘블랙머니’ 이상으로 심한 상황이지만, 정작 ‘블랙머니’도 다른 대형 배급사의 영화들과 큰 차이 없이 스크린을 일찌감치 대량으로 확보해서 관객을 모은 전략을 사용한 것에 대한 성찰은 없었다.

분명 ‘블랙머니’는 제작 단계부터 시민사회단체 관계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론스타 의혹’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담긴 작품이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의 역량을 가득 투여하며 만든 작품은 오히려 ‘론스타 의혹’이 지녔던 문제를 고발하는 대신, 한국 영화가 영화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 놓인 실상을 자기 스스로 반증하는 모습을 보였다. ‘벌새’의 김보라나 ‘기생충’의 봉준호 등 몇몇 실력 좋은 감독에게만 의존할 뿐 참신한 시도가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2000년대 중반 봉준호의 ‘괴물’ 이후로 보편화 된 ‘스크린 대량 확보 전략’은 결국 일부 대형 배급사와 직배사의 영화만이 시장에서 대두되는 문제를 만들었다. 이미 한국 영화가 빠진 두 개의 어둠에서 ‘블랙머니’는 벗어나는 대신 철저히 답습하는 결과를 창출했다. 그렇게 ‘블랙머니’는 역설적으로 한국 영화 그 자체를 고발하는 작품이 되었다.

[기사 수정 : 2일 15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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