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심의다.” RTV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심의와 재판에 참여한 김영준 RTV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일보가 연일 ‘백년전쟁’ 판결을 문제 삼으며 역사적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 역사 논쟁도 필요하지만 정작 재판의 핵심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 정당성 여부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 결정과 엇갈린 판결 리스트. 디자인=이우림 기자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 결정과 엇갈린 판결 리스트. 디자인=이우림 기자
▲ 조선일보는 지난 22일자 아침신문에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방영한 RTV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결정한 대법원을 두고 정치 기구로 전락했다는 기사를 작성했다.
▲ 조선일보는 지난 22일자 아침신문에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방영한 RTV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결정한 대법원을 두고 정치 기구로 전락했다는 기사를 작성했다.

이번 판결은 ‘정치심의’ 논란이 끊이지 않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방송·통신 심의가 잘못됐다는 판결이 이어진 흐름과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 방통심의위 심의에 대한 행정 소송 및 연관된 재판 결과를 분석한 결과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방송사 중징계(법정제재) 및 통신심의 시정요구 가운데 8건이 제재 취소 판결이 나오거나 같은 사안에 엇갈린 판결이 나왔다. 심의기구로서 존립 기반이 흔들릴 정도의 결과다.

‘백년전쟁’ 외에도 △ 천안함 사고 의혹을 다룬 KBS ‘추적60분’(2010년) △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을 다룬 KBS ‘추적60분’(2013년) △ 정부 축산정책을 비판한 CBS ‘김미화의 여러분’(2012년) △박창신 신부 인터뷰 논란이 불거진 CBS ‘김현정의 뉴스쇼’(2013년) △ 박근혜 대통령과 인공기를 나란해 배치한 MBC ‘뉴스데스크’(2013년)에 법원이 방통심의위의 제재를 취소하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통신심의의 경우 △쓰레기 시멘트 문제 제기한 인터넷 게시글 삭제 결정(2009년) △ 북한의 IT분야를 다루는 영국인이 운영하는 사이트 노스코리아테크 차단 결정(2016년)이 재판에서 엎어졌다.

방통심의위 제재와 같은 사안을 다룬 재판에서 다른 판단이 나온 경우는 MBC ‘PD수첩’이 대표적이다. 방통심의위는 MBC ‘PD수첩’ 광우병편에 최고 수위 제재인 ‘시청자 사과’를 결정했으나 명예훼손 재판에서 PD수첩 제작진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정미홍씨가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을 ‘종북’이라고 발언해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는데 정작 이후 TV조선 ‘뉴스쇼판’에 출연해 같은 발언을 하자 가장 낮은 수준의 행정지도를 받은 일도 있다.

▲ MBC ‘PD수첩’ 제작진들이 지난 2010년 12일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명예훼손 혐의 무죄판결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맨 앞줄 왼쪽부터 이춘근 PD, 조능희 PD, 송일준 PD. 사진=이치열 기자
▲ MBC ‘PD수첩’ 제작진들이 지난 2010년 12일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명예훼손 혐의 무죄판결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맨 앞줄 왼쪽부터 이춘근 PD, 조능희 PD, 송일준 PD. 사진=이치열 기자

방통심의위 심의는 방송과 통신으로 나뉜다. 방송심의는 ‘주의’ ‘경고’ ‘관계자 징계’ ‘과징금’ 등의 중징계를 결정할 수 있다. 보도 기능이 있는 방송사의 경우 중징계는 재허가 재승인 심사 때 감점으로 작용한다. 통신심의는 인터넷 사이트 및 게시글을 삭제·차단하는 심의다. 방송심의의 경우 방송통신위원회가 법적 권한을 갖고 있어 소송은 방통위가 대리한다.

방통심의위는 정부·여당에서 6명, 야당에서 3명의 위원을 추천해 정부·여당 의중에 따라 독주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기구 설립 때부터 정치심의 논란이 끊이지 않던 방통심의위는 박근혜 정부 들어 공안검사, 뉴라이트 학자 등이 위원으로 선임되며 편파성이 더욱 강화됐다.

정부·여당 추천 위원들의 무기는 ‘모호한 심의조항’이다. 방통심의위는 사실상 법적 판단을 하는 기구지만 정치적 현안의 경우 “내용이 객관적이지 않다”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사안에서 균형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며 ‘공정성’과 ‘객관성’ 조항을 적용해 제재해왔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했고,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이 없다”(박만 위원장) “우리 대통령이고 우리가 제일 잘 아는데 외국자료에 의존하는 것이 적정하지 않다.”(박성희 위원). ‘백년전쟁’ 심의 당시 발언을 보면 법리적 판단은 보이지 않고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 점 자체에 반발하고 있다.

▲ RTV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 RTV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김영준 RTV 팀장은 당시 심의를 떠올리며 “미국 CIA 문서, 프레이저 보고서를 근거 없는 문서라고 자의적으로 판단했다”며 “RTV는 퍼블릭엑세스 채널로 소수의 목소리, 다뤄지지 않은 의견들을 듣는 게 목표인데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RTV를 대리했던 양홍석 변호사(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는 “공정성 기준 자체가 고무줄이다. 위원이 전문성 중심으로 선임되지 않아 세밀하게 따지지 않는 문제도 있다. 파급효과는 큰 기관인데 심의 완성도가 부족하다”고 했다.

대법원 역시 ‘백년전쟁’의 손을 들었다. 재판부 다수는 ‘백년전쟁’을 “주류적인 역사적 사실과 해석에 대해 합리적 수준의 의문을 제기하는 역사 다큐멘터리”로 보고 상반된 관점을 모두 제시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공정성’ 위반이 아니라고 봤다. 보도 장르가 아니고 지상파 방송사가 아닌 점 등 매체 특성도 반영했다. 특히 김재형 대법관은 보충의견으로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행정기관”을 언급하며 심의의 ‘위헌성’이 있다고도 판단했다.

‘백년전쟁’ 판결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튀는 판결’이 아니다. 큰 틀에서 방통심의위 제재 취소를 결정한 다수 재판에서 인터뷰, 탐사보도, 다큐멘터리 등에서 ‘공정성’은 ‘기계적 균형’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판단이 일관된다. KBS ‘추적60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제재 취소 소송 재판부는 “공정성과 균형성의 문제를 일정한 수학적 기준이나 단순히 방송 분량만으로 판단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 지난 2013년 9월 7일 방송된 KBS ‘추적 60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무죄판결의 전말’ 예고편. 사진=KBS ‘추척 60분’ 방영화면 갈무리
▲ 지난 2013년 9월 7일 방송된 KBS ‘추적 60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무죄판결의 전말’ 예고편. 사진=KBS ‘추척 60분’ 방영화면 갈무리

‘광우병’ ‘천안함 사건’ ‘정부 축산정책’ 등 재판에서 방통심의위가 ‘허위’로 규정한 내용이 ‘허위로 보기 힘들다’는 판단이 나오거나 ‘합리적 의심’으로 평가받았다. 양홍석 변호사는 “논거의 적합성, 적정성은 조사 권한이 제한적인 방통심의위가 판단하기 힘든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박건식 MBC 시사교양1부장은 “방통심의위 논리가 맞다면 조국 전 장관 관련 보도는 문제점만 보도하니 모두 징계해야 하나”라며 “공정성은 모두가 합의할 수 없는 개념인데 정치기구에서 이를 맡으면 결국 정부·여당의 대리인이 판단하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는 “공정성 심의로 언론이 위축돼 맥락을 전하거나 사실을 파헤치는 보도보다는 기계적 중립의 무책임한 보도가 양산돼 알 권리와 멀어질 수 있다”고 했다.

통신심의의 경우 ‘불법’ ‘유해’ 정보에 대한 광범위한 심의가 개선돼야 한다. 손지원 오픈넷 변호사는 “노스코리아테크, 쓰레기 시멘트 건에선 심의 자체가 부적절했다는 판단이 나왔으나 유병언 사체 사진 삭제에 대한 소송은 패소했다”며 “당시 방통심의위는 ‘잔혹 또는 혐오감을 주는 내용’ 조항을 근거로 삭제했다. 정치적인 접근을 해도 유해정보 등 심의 기준이 추상적이고 강해서 이 같은 적용이 가능한 문제가 있다”고 했다.

▲ 노스코리아테크 사이트 갈무리
▲ 노스코리아테크 사이트 갈무리

문제는 지금도 정치심의를 지탱해온 ‘시스템’이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 4기 방통심의위는 정치 심의가 줄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여당 위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발생하고 있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경우도 줄었다. 그러나 위원 추천 구조와 논란이 된 심의 규정은 대부분 그대로다.

박건식 부장은 “특정 정부의 선의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미국은 공정성 심의 자체를 없앴다”며 “방송심의는 장기적으로 선정성, 폭력성 등 어린이 아동 청소년 보호가 주목적이 돼야 한다”고 했다. 양홍석 변호사는 “‘백년전쟁’ 논란 이전부터 공정성, 객관성 조항 폐지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있었는데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방통심의위가 제재하고 법원이 이를 무력화시키는 코미디가 언제 다시 재현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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