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1월 언론노련으로 출발한 언론노조가 창립 31주년을 맞았다. 

언론노동운동사엔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두 라이벌이 있다. 고(故) 성유보 민언련 이사장은 “‘동아투위’는 사실 노조를 만들려다가 실패한 사례”라고 했다. 

언론역사에 1974년은 ‘74노조’ 시대다. 동아와 한국일보 기자들은 그해 3월과 12월 노조를 결성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그해 3월7일 출판노련 동아일보지부를 결성했다. 회사는 다음날 회사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조학래 지부장과 11명 모든 노조 간부를 해고했다. 한국일보 기자들도 그해 12월10일 노조를 결성했다. 회사는 다음날 이창숙 지부장을 해고했다. 

동아일보노조는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졌다. 이창숙 한국일보노조 지부장은 대법원에서 승소하면서 7년의 긴 법정투쟁을 이어갔지만 끝내 복직하지 못했다. 이렇게 74노조는 실패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그해 가을 10월23일자 초판 사회면에 1단으로 실린 서울농대생 300명의 시위 기사가 다음 판에서 빠지는 걸 목격했다. 기자들은 다음날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를 열었다. 

▲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1면. 파란색 기사가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사이다.
▲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1면. 파란색 기사가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사이다.

 

같은 시기 한국일보도 급박했다.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가 한국일보 동남아 특파원이 쓴 베트남 티우 정권의 부패상을 담은 기사가 국내 정세를 빗댄 것 아니냐고 시비 걸었다. 10월23일 낮 12시 장강재 발행인이 임의동행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기자들은 농성에 들어가 24일 밤 10시 민주언론수호결의문과 4개 항의 행동지침을 채택했다. 언론통제에 항의하는 이 성명은 우여곡절 끝에 10월25일자 1면에 실렸다. 기자들의 저항은 연말까지 이어졌다. 그 끝이 12월10일 노조 결성이었다. 

33살에 신문사에서 쫓겨난 여 기자는 어떻게 살았을까. YH사건, 동일방직 등 격렬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현장을 찾아다녔다. 그때 이창숙은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도 봤다. 이창숙은 ‘1974년 겨울’을 “우리는 왜 법에만 매달렸을까. 너무나 책상물림다운 대응이었다”고 회상했다. 

▲ 한국일보 노동조합 역사 담은 책 ‘1974년 겨울’ 출판기념회. 이창숙 기자는 오른쪽에서 세번째이다. 사진=언론노보
▲ 한국일보 노동조합 역사 담은 책 ‘1974년 겨울’ 출판기념회. 이창숙 기자는 오른쪽에서 세번째이다. 사진=언론노보

 

노조 결성에 따른 보복이란 빌미를 안 주려고 한국일보는 이창숙을 결성 하루 전날로 소급해 해고했다. 회사는 재판에선 이 기자를 무능하고 동료 관계도 안 좋고 취재원에게 삿대질이나 하는 저질기자로 매도했다. 

대법은 1977년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이창숙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한국일보는 파기환송 재판 직전 묘수를 짜냈다. 자진 폐업하고 1977년 연말 전 직원을 해고한 뒤 회사를 주식회사로 바꿔 다음날 해고한 전 직원을 재고용했다. 단 1명 이창숙만 빼고. 

74노조 실패 뒤 언론사 노조는 10년 넘게 침묵했다. 현존하는 언론노조는 1987년 7~9월 공돌이 공순이 소리를 들었던 생산직 노동자들 대투쟁에 기대어 결성됐다. 제일 먼저 합법노조를 만든 게 1987년 10월27일 한국일보노조였다. 그해 연말 동아일보가 두 번째 노조를 만들었으니, 동아와 한국일보는 오랜 라이벌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언론사 노조는 74노조가 처음이 아니었다. 1960년 5월15일 대구일보, 6월17일 연합신문, 6월22일 평화신문 기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식인 노조 결성이 붐을 이뤘던 1960년 언론노조는 동아·경향·조선·한국일보 등 유력 일간지로 파급되지 못하고 3개사 노조로 그쳤다.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남성 중심으로 재편됐지만 그전까지 모든 민주노조 운동은 여성이 주도했다. 언론노조운동도 마찬가지다. 여성, 지방신문처럼 늘 작고 힘없는 이들이 먼저 일어섰다. 늘 ‘풀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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