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그룹 ‘카라’(KARA) 출신 구하라씨 사망을 계기로 디지털성범죄 현실을 따르지 못하는 법적 한계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사회적 이슈와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발의되는 법안들이 처리되지 않으면서 법안과 함께 피해와 희생도 쌓이고 있다. 비극적 사건과 여론이 힘을 실어주길 기다리며 ‘나중’으로 미뤄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한때 고인과 교제했던 최종범씨는 고인에 대한 불법촬영 영상을 유포 또는 이를 이용해 금품을 요구하지 않았고, 수치심을 유발하지 않았다는 1심 재판부 판단에 따라 불법촬영 혐의 ‘무죄’를 선고 받았다. 현행 법체계상 불법촬영을 이용한 협박은 성폭력이 아니라는 이유다.

국회에는 이미 이와 관련한 성폭력처벌특례법 개정안들이 여러 건 발의돼있다. 윤상직 자유한국당 의원과 김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각각 1월과 5월에 촬영물 등으로 협박하는 자를 5년 이하 징역형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3월 윤소하 정의당 의원은 촬영대상자를 괴롭히거나 협박할 목적으로 통신매체를 이용해 음란행위를 하거나 카메라 등을 이용해 촬영·유포하는 행위를 가중처벌하는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지난 10월 진선미 의원 대표발의안 촬영물을 유포하지 않더라도 반포·판매·임대·제공 또는 공공연하게 전시·상영하겠다며 다른 사람을 협박하거나 강요한 경우 성범죄로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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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촬영을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활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한 촬영 행위’로 규정한 것도 최씨 관련 혐의 무죄 선고를 가능케 한 한계로 지적된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부대표는 미디어오늘에 “성적 욕망을 일반 남성의 도의적 판단, 곧 경찰과 사법부 판단으로 정한다. 성폭력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명시한 것도 문제”라며 “관련 법을 한 번 개정하긴 했지만 개정 전부터 있었던 언어·표현의 문제와, 이것으로 유무죄가 갈리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밝혔다.

관련 개정안 역시 이미 2년 전 발의됐다. 2017년 9월 박남춘 민주당 의원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 대신 ‘성적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로 바꾸는 개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2년 넘게 계류 중이다. 이듬해인 2018년 7월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이라는 대목을 삭제한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 대표발의안도 마찬가지로 계류 중이다. 올해 3월 윤소하 의원 대표발의안도 ‘수치심’을 ‘불쾌감’으로, ‘수치심 유발’을 ‘성적 대상으로 하여’로 바꾸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밖에 불법촬영물 삭제 지원 비용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부담하게 하거나, 관련 비용·업무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위탁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의 법안들이 줄줄이 계류 중이다. 민간시설, 화장실 등 공공장소 등에서의 불법촬영 방지를 위해 지방자치단체·경찰 등 의무를 강화하는 개정안,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 등의 불법촬영 유통 책임을 강화하고 처벌 규정을 두는 법안 등도 발의 후 묻혀 있이다. 한 건 한 건의 사건·사고를 넘어 불법촬영물, 성착취물을 기반으로 세워진 산업을 해체하기 위한 방안들도 여러 차례 논의됐으나 실효적 대응책은 요원하다.

한편 관련 사안을 보도하는 언론의 신중함도 요구된다. 피해자 이름을 딴 ‘○○○ 동영상’ 등의 표현이 과거에 비해 대폭 줄어들긴 했으나, 범죄이자 피해자가 있다는 점을 가릴 수 있는 ‘포르노’라는 용어가 여전히 일부 기사 제목이나 내용에 사용되고 있다는 지적은 이미 수없이 반복됐다. 서 부대표는 “고 설리씨 사건을 통해서 언론도 조금 배우지 않았나, 구하라씨 사건에 대한 보도도 그때보다는 조금 괜찮아졌다는 느낌은 있다. 팬분들 문제 제기로 비판을 많이 받아던 기사가 지워지는 일들도 있다고 한다”면서도 “여전히 폭력적 방식이 남아 있다. 문제를 제기했을 때 나아지는 사회, 상식을 만들어나가는 과정 중에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그것을 이뤄내기 위한 계기들이 너무 비극적인, 강력한 사건들이 있을 때 조금씩 사회에 남는 교훈이 있다는 게 씁쓸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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