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치열했던 판결이다.” 한 현직판사의 총평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지난 21일 시민방송 RTV에서 2013년 초 방영된 ‘백년전쟁’(감독 정지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법정 제재 처분이 위법하다며 방통위 손을 들어줬던 1·2심을 파기했다. 이번 결정은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만, 판결문은 A4 81장 분량이었다. 7대6. 대법관 다수의견은 7명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는 ‘7대6’으로 상징되는 아슬아슬한 사회적 토대 위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나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번 판결문에는 공정성·객관성에 대한 대법관들의 논쟁을 비롯해 표현의 자유와 정부의 심의 제재에 대한 근본적 비판까지 담겨 언론계에 던지는 함의가 적지 않다. 대법원이 밝힌 이 사건의 쟁점은 ①방송법상 방송의 공정성․공공성 심의대상 프로그램이 보도 프로그램에 한정되는지 여부 ②방송내용이 객관성과 공정성․균형성 유지의무를 위반했는지 여부 ③방송내용이 사자 명예존중 조항을 위반했는지 여부 ④제재 처분이 재량권의 한계를 일탈․남용해 위법한지 여부다. 

▲RTV에서 방송된 '백년전쟁'.
▲RTV에서 방송된 '백년전쟁'.

법정 제재 처분이 위법하다는 다수의견을 낸 대법관 7인(김명수·김재형·박정화·민유숙·김선수·노정희·김상환)은 우선 객관성·공정성·균형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객관성’이란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증명 가능한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여 있는 그대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사실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공정성’이란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 된 사안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의견을 전달함에 있어 편향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균형성’이란 각각의 입장에 대하여 시간과 비중을 균등하게 할애해야 한다는 양적 균형이 아니라 관련 당사자나 방송 대상의 사회적 영향력, 사안의 속성, 프로그램의 성격 등을 고려하여 실질적으로 균등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공평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정의를 바탕으로 다수 대법관은 “(‘백년전쟁’) 방송은 역사적 사실과 인물(이승만·박정희)에 대한 논쟁과 재평가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외국 정부의 공식 문서와 신문기사, 관련자 및 전문가와의 인터뷰 등을 기초로 했다는 점에서 진실과 다소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한 사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방송이 주는 전체적인 인상은 기존의 역사적 사실과 그 전제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 정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시청자가 제작한 방송프로그램은 방송내용의 진실성과 신뢰도에 대한 기대의 정도나 사회적 영향력의 측면에서 방송사업자가 직접 제작한 방송프로그램과 다를 수밖에 없다”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시청자가 제작한 방송프로그램의 객관성․공정성․균형성 심사를 할 때는 방송사업자가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에 비하여 심사기준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 “교양 프로그램이나 오락 프로그램이 방송의 객관성․공정성․균형성 유지의무를 위반했는지 여부를 심사할 때는 그 특성을 고려해 보도 프로그램과는 차별화된 심사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무엇보다 “제작자의 관점과 다른 관점을 가진 관련 당사자의 의견을 모두 반영한 역사 다큐멘터리만 방송해야 한다면, 주류적 통념에 대한 의문이나 의혹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는 방송에서 다루기 힘들 뿐만 아니라 자칫 역사적 관점에 대한 단순한 나열에 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객관성․공정성․균형성에 대한 심의기관의 판단이 시민방송·비지상파·다큐멘터리라는 ‘특성’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지적이었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이 같은 다수의견에 맞서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 6인(조희대·권순일·박상옥·이기택·안철상·이동원)은 “방송이 근거로 내세운 자료들은 제작 의도에 부합하도록 선별된 것이었다”며 “사자에 대한 모욕과 조롱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에 포섭될 수도 없으므로, 이 사건 제재 처분이 적법하다는 원심판결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들은 다수의견을 가리켜 “매체별, 채널별, 프로그램별 특성을 (심의 제재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다수의견을 따를 경우 특정 역사적 인물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내용의 방송을 하더라도 ‘역사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취하기만 하면 방송법에 따라 아무런 제재조치를 할 수 없게 되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또한 “다수의견이 주장하는 ‘완화된 심사기준’의 실천적인 의미는 결국 처분 사유의 존재에 관한 피고(방통위)의 증명책임의 정도를 강화하거나 제재 처분의 수위를 결정할 때 재량권 행사에 감안하라는 것일 수밖에 없다”며 “특정 매체, 채널, 프로그램의 영향력에 따라 심의규정 위반 여부가 달라진다는 것이어서 행정청의 자의적 처분을 용인하고 정당화해 헌법이 요구하는 법치 행정 원칙에 반한다”고 판단했다.

6명의 대법관은 무엇보다 “방송을 한 번이라도 시청했다면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사생활 등 역사적 평가와 무관한 내용이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있고, 정치적․정책적 과오를 지적하는 부분 역시 조롱과 모욕적인 표현과 화면구성을 통해 희화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이 사건 제재 처분은 관계자 징계 및 경고에 불과해 낮은 수준의 제재 조치다. 만약 이 사건 각 방송이 지상파방송에서 송출되었다면 제재의 정도는 훨씬 중했을 것이므로 피고가 원고(RTV)에 대한 제재 처분의 수위를 정하면서 이미 매체별, 채널별, 프로그램별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이들은 또한 ‘백년전쟁’을 가리켜 “개인인 시청자가 단순하게 제작한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제작 장비와 체계를 갖춘 제작진이 유명 배우의 내레이션, 여러 교수들의 인터뷰, 각종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한 상당한 수준의 편집을 거쳐 제작한 시리즈 기획물인 장편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하며 “다수의견은 방송의 실체를 고려하지 않고 마치 시청자 개개인이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는 방송 정도로 그 수준을 낮춰 봄으로써 면죄부를 부여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원심은 선거방송이나 보도방송 같은 수준의 기계적 동등함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바 없다”고 강조한 뒤 “이 사건 방송은 제작 의도와 다른 의견을 전혀 소개하지 않았다. 원심이 이 사건 각 방송이 공정성․균형성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이유는 방송이 특정한 관점을 취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해당 방송에 관점의 다양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은 “역사 다큐멘터리를 제작·방송하려는 방송사업자 또는 그 제작자는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하여 겸허한 자세로 성찰해야 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여야 한다는 공정성․균형성의 요구”라고 판단했다. 

반대의견에 더한 조희대·박상옥 대법관의 보충의견은 한 발 나아가 “다수의견의 논리대로라면 역사 다큐멘터리 같은 교양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객관성․공정성․균형성이 아예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으며 “이 사건 제재 처분은 헌법 제21조에 따라 제정된 방송법령에 근거한 것으로서 표현의 자유나 위헌의 문제가 제기될 여지가 전혀 없으며, 처분 사유가 인정되는지, 처분의 정도가 재량권의 일탈․남용에 해당하는지가 문제 될 뿐”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또한 법정 제재를 두고 “표현의 자유와 위헌의 문제를 끌어들여 공격하는 것은 전혀 합리성이 없는 과장된 논박”이라고 주장했으며 “원심은 방송사업자로서의 자유라는 사익과 국민통합을 위한 언론의 책임이라는 공익 사이의 갈등상황을 적절히 중재․해결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오히려 이번 판결로 “헌법과 방송법령에 따른 방송심의제도를 형해화시키고,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 된 사안을 다루는 방송의 책임과 방송사업자의 자유 사이의 균형을 잃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지난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위해 입장한 대법관 13명. ⓒ연합뉴스
▲지난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위해 입장한 대법관 13명. ⓒ연합뉴스

다수의견에 더한 김선수·김상환 대법관의 보충의견은 반대표를 던진 대법관 6인의 주장에 대한 재반박이었다. 이들은 이번 판결을 두고 “국민의 역사 해석과 표현에 대한 국가권력 개입의 한계와 정도가 판단된다는 점에서 신중한 자세가 요구된다”고 강조한 뒤 “(다수의견으로) 완화된 심사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한 것은 공정성․공공성 심사를 할 때 매체별, 채널별,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하라고 한 방송법 및 구 심의규정의 명시적인 규정에 근거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반대의견이 매체별, 채널별,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함이 없이 동일한 심사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취지라면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같게 취급하여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은 또한 방송내용이 일방의 의견만 담았다는 주장에 대해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이미 주류적 지위를 점하고 있으므로, 방송에서 이에 관한 내용을 소개해 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이들은 무엇보다 “다수의견이 이 사건 제재 처분을 위법하다고 보았다고 해서 방송심의제도를 형해화시켰다고 할 수는 없으며, 보다 구체적인 타당성을 갖도록 실질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고 자평했다. 또한 “대법관들 사이의 논쟁은 방송에서 제기한 역사적 쟁점에 관해 어떤 관점과 평가가 더 올바르고 타당한 것인가를 두고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이승만·박정희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법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 대목이다. 

다수의견에 더한 김재형 대법관의 보충의견은 13명 중 가장 진보적이었다. 그는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행정기관이 방송심의제도를 통해 방송의 공정성을 강제하는 것은 방송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 현행 방송심의제도는 행정기관에 의한 방송내용 통제로 작용할 수 있어 위헌적 요소가 있다”며 공정성 심의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방송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매체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자원의 희소성 근거가 희박해짐에 따라 공정성 원칙을 유지할 필요성이 감소됐다. 1987년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공정성 원칙이 표현의 자유를 선언한 수정헌법 제1조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공정성 원칙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다”고 강조했다.

13명 대법관의 판단은 오늘날 표현의 자유와 방송 심의를 둘러싼 우리사회의 인식을 드러내는 축소판이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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