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행적을 비판적으로 다룬 다큐 ‘백년전쟁’을 방송한 시민방송 RTV에 내린 법정제재 처분이 위법하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2013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법정제재를 받은 지 6년 만의 판결이다.

▲ 다큐 백년전쟁 포스터
▲ 다큐 백년전쟁 포스터

방송통신심의위로부터 공정성과 객관성, 사자 명예훼손 조항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법정제재를 받자 RTV는 이를 취소해달라는 소송(제재조치명령 취소소송)을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했다. 그러나 1심에 이어 항소심도 방송통신위원회 제재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이와 판단을 달리한 대법원 전원합의체(대법원장 김명수)가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것.

대법원은 RTV가 객관성과 공정성, 균형성 유지 의무를 위반했다고 보지 않았다. 대법원은 “방송 내용 객관성과 공정성을 심의할 때 매체별, 채널별,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시민방송은 시청자가 제재하는 방송이다. 지상파나 유료 비지상파 방송이 아니”라며 “보도 프로그램과 달리 상대적으로 완화된 심의 기준을 반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RTV는 시민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퍼블릭 액세스(Public Access·시청자 제작) 전문 TV 채널을 운영하는 법인이다.

대법원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을 편향적으로 다뤘다고 보기 어렵다. 주류적 통념에 대한 의문, 의혹을 제기하고 다양한 여론의 장을 만들었다. 백년전쟁을 방영했다는 이유로 제재하면 앞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기 어려워지고 표현의 자유는 침해될 것”이라고 지적한 뒤 “다큐멘터리는 선거방송이나 보도방송처럼 각각 동등한 기계적 균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백년전쟁이 이승만·박정희에 대한 사자 명예훼손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판단했다. 대법원은 “표현이 다소 거칠고 과장된 면이 있지만 외국 정부 공식문서와 신문기사 등 객관적 사료에 근거하고 있다. 중요한 부분들이 대부분 객관적 사실과 합치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해당 다큐는 공적 관심 사안을 다루고 있다. 공공 이익을 위한 방송이다. 백년전쟁은 진실을 왜곡하거나 객관적 사실을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역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해 제작한 백년전쟁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다룬 4부작 다큐멘터리다. 2012년 11월 1부 ‘두 얼굴의 이승만’과 박정희 경제성장 신화 허실을 파헤친 번외 편 ‘스페셜에디션 프레이저보고서’ 등을 공개했다. RTV는 해당 영상을 2013년 1~3월 총 55차례 방송으로 내보냈다.

방통심의위는 2013년 8월 해당 방영분들을 심의 안건으로 상정했다. 방통심의위는 백년전쟁이 방송심의규정 공정성, 객관성, 명예훼손 조항 등을 위반했다며 이를 방송한 RTV에 법정제재인 ‘관계자 징계 및 경고’를 결정했다.

2014년 원심은 RTV가 방송심의규정을 위반했다고 판단하고 소송을 제기한 RTV의 제재조치명령 취소 청구를 기각했다. 2015년 항소심 재판부도 원심을 인용했다.

김영준 RTV 팀장은 21일 미디어오늘에 “대법원 전원합의체 파기환송 결정은 방송 독립성과 다양성,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지극히 당연한 판결이다. 방송심의에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공평의 원칙만이 아니라 사실을 근거한 검증과 확인 과정 그 자체에 있다는 게 확인됐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언론 본연의 역할인 비판적 문제 제기가 국민 알 권리를 위해 보장돼야 한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방통심의위 중징계 결정이 감정적이고 자의적 판단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규제 기관의 이 같은 행태가 다른 방송사에 있어선 안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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