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이 시행을 3달 앞둔 가운데 정부가 지정한 국가핵심기술 관련 정보를 광범위하게 숨길 수 있도록 규정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비공개할 정보를 모호하게 규정한 데다 정보를 얻어도 취득 목적 외에는 알리지 못하도록 해, 생명·안전과 직결된 공익적 문제제기를 가로막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8월 공포된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엔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를 공개해서는 아니 된다(9조 2항)”는 조항이 신설됐다. 또 정보공개 청구를 하거나 산업기술 관련 소송을 하는 이들에게 비밀유지 의무를 부여했다. “산업기술을 포함한 정보라면 적법하게 취득했더라도 그 취득 목적 외로 사용·공개해선 안 된다(14조 8호)”는 규정을 담았다. 현행법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은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핵심기술을 지정한다.

개정된 법은 이 같은 비밀유지 의무를 어기면 3년 이하 징역에 처하거나 기업이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했다. 또 기업이 산업기술 유출이나 침해가 우려될 때 수사기관에 조사도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법안은 이종구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장(자유한국당)이 7월 대표발의한 뒤 한달여 만에 압도적 표차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내년 2월21일 시행에 들어간다.

시민사회는 기업이 산업기술 유출 방지를 내세워 노동자·시민 안전과 생명 관련 정보 공개를 거부하는 데 조항을 악용할 소지가 높다고 비판한다. ‘기술 관련 정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인체유해성 등 안전 관련 정보공개 청구도 기술과 관련 있다는 이유로 거부될 수 있어서다. 산업기술과 연관된 정보라면 공익을 목적으로 한 문제 제기도 처벌할 수 있다.

▲반올림과 노동건강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날 오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뒤늦게라도 산업기술보호법 개악안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국회에 촉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반올림과 노동건강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20일 오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뒤늦게라도 산업기술보호법 개악안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국회에 촉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김예찬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활동가는 “현행 정보공개법은 경영상 비밀 사항이라도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면 적극 공개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는데, 이같은 대원칙이 깨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예찬 활동가는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 등 산업재해 피해자들의 법정 투쟁도 알권리 원칙 덕에 가능했고, 이들이 희귀난치병에 걸린다는 사실도 알릴 수 있었다. 이제는 반도체 공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정보를 얻기도 어려워질 뿐더러, 작업장 환경이 노동자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이들에게 알릴 수 없다”고 우려했다.

실제 법안 내용이 알려진 것도 시민사회단체와 삼성의 정보공개 소송 과정에서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따르면 최근 삼성은 반올림이 제기한 ‘삼성 반도체 공장 작업환경 보고서’ 공개청구 소송에서 해당 법을 들고 나왔다. 삼성 측 변호사는 “이 보고서의 공개 논란은 입법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했다. 법률사무소 지담의 임자운 변호사는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은 그간 삼성전자가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에 관한 자료를 은폐하기 위해 산재·정보공개청구 소송에서 반복해온 주장을 명문화한 것이다. 법원은 삼성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잇따라 공개 판결했는데, 그 주장이 고스란히 법률이 됐다”고 말했다.

[ 관련 기고 : 기어코 ‘삼성 보호법’을 만들어낸 국회의원들께 ]

▲임자운 변호사(법률사무소 지담·반올림 활동가)가 20일 산업기술보호법 개악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반올림과 노동건강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20일 오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뒤늦게라도 산업기술보호법 개악안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국회에 촉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반올림과 노동건강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20일 오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뒤늦게라도 법안이 시행되기 전 개악안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국회에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국회의원 전원에 전달한 의견서에서 각 의원이 법 개정 당시 쟁점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와 문제점을 바로잡을 의향에 대해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또 해당 법조항을 삭제한 개정안이나 새 법안을 발의하는 등 논의를 시작하라고 밝혔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