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병 갑질로 유명한 박찬주 전 대장이 최근 ‘삼청교육대’를 입에 올렸다. 1981년 소위로 임관한 박찬주 전 대장은 그가 육군사관학교 생도 때 벌어진 삼청교육대를 잘 모른다. 

12·12 쿠데타와 이듬해 5·18까지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8월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발표한다. 그것이 삼청교육대의 시작이다. 

당일 경향신문은 사회면(7면) 머리에 ‘삼복(더위)에 소나기… 시원한 용단’이란 큰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 시절 전두환이 하면 뭐든지 ‘용단’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삼청교육대다. 

동아일보는 다음날인 1980년 8월5일자 3면에 ‘무법의 뒷골목’이란 해설기사에서 당시 문교부가 전국 학교에 학교정화운동의 강력한 추진을 시달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고등학교 순화교육을 ‘학원 부조리’ 해소로 미화했다. 8월6일자 동아일보 1면엔 ‘국보위 폭력배 등 1만6599명 검거’라는 기사가 실렸다. 열흘 뒤 8월15일자 동아일보 7면엔 ‘국보위 발표 사회악 사범 3만578명 검거’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시절엔 정부 지시 열흘 만에 3만명 검거가 가능했다. 정상적인 국가에선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검거한 3만명 중에 신군부가 내건 ‘사회악’에 해당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됐을까. 

1980년 8월13일자 여러 신문 사회면엔 일제히 ‘폭력배 순화교육 현장’ 사진이 실렸다. 삼청교육대에서 4주간 순화교육을 받는 교육생들이 웃통을 벗고 목봉체조 하는 모습이었다. 중앙일보는 ‘그늘진 과거를 땀으로 씻어낸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군 당국은 신체가 허약하고 개전의 정이 뚜렷한 9명은 이미 퇴소시켰고 (중략) 나이에 알맞은 체력단련을 시키고 있다. (중략) 최고령자인 김갑영씨(서울 행당동)는 ‘좀 쉬라’는 중대장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략) 휴식시간에도 이들은 조용히 과거를 반성하는 생각에 잠겼다”고 썼다. 동아일보는 “교육생들이 400여 지도요원들이 자신들의 개과천선을 돕는데 대해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낀다”고 썼다. 

▲ 삼청교육대 입소생들이 봉 체조를 받고 있는 모습
▲ 삼청교육대 입소생들이 봉 체조를 받고 있는 모습

 

그 사이 놀란 최규하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고, 4주 뒤 토요일인 8월30일자 신문은 순화교육을 마치고 삼청교육대를 퇴소하는 9600명을 담았다. 일요일 하루를 쉬고 다음날 9월1일 전두환은 대통령에 취임했다. 

동아일보는 1980년 8월30일자 7면에 삼청교육대를 퇴소하는 9600명을 ‘새사람이 되련다’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날 여러 신문이 ‘검게 탄 얼굴’, ‘새 생활 다짐’, ‘웃음 띤 얼굴’이란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채 20년도 안 된 90년대 중반 얼굴이 짓이겨진 채 숨진 삼청교육생 사진이 발견됐다. 살인적 폭행이 난무했고 확인된 사망자만 64명에, 행방불명된 사람도 100명이 넘었다. 

10대 고등학생과 민주노조 간부들까지 마구잡이로 붙잡아 수용소에 쳐넣고 몽둥이로 때리는 걸 순화교육으로 미화했던 게 당시 언론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70년대말 한국의 대표적 민주노조였던 원풍모방, 반도상사, 대한전선, 콘트롤데이타 등의 노조간부 191명을 정화조치란 이름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당시 신군부가 내건 ‘사회정화’에 발맞춰 기사를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양산했던 언론사 중에 과거를 참회한 곳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런 언론 덕분에 국민 대부분은 삼청교육대를 악의 무리들을 구제해 새 삶을 열어준 참군인들의 용기있는 결단 정도로 생각한다. 박찬주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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