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내세울 것 없는 현장 경력과 연구 실적에도 종종 기자들 전화를 받는다. 갑자기 불거진 미디어정책 관련 이슈나 저널리즘, 미디어 현장의 노동에 관련된 의견을 묻는 전화다. 기자들의 모든 질문에 준비한 답변이 있거나 오랫동안 고민해 온 연구 주제가 아니니 정중히 거절하는 일도 많다. 그럼에도 마감에 쫓기거나 다른 인터뷰이를 구하지 못했다는 기자의 사정 때문에 쏟아낸 설익은 답변을 이후 기사로 읽으면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기자가 전화로 의견을 묻는 때는 두 경우다. 하나는 기사에 필요한 짧은 멘트가 필요한 경우, 다른 하나는 전화 인터뷰 하거나 카메라 인터뷰를 요청하는 경우다. 기자들이 간단한 멘트를 요청할 때는 인터뷰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에 긴 통화를 하더라도 내가 한 답변 중 일부만이 인용된다는 걸 안다. 그러나 전화나 카메라 인터뷰를 하는 경우 기자가 요청하는 인터뷰가 모두 똑같지는 않다.

인터뷰 결과인 뉴스나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기자가 기사의 프레임을 미리 정해 놓고 여기에 필요한 발언만 선별해 쓰기 위한 인터뷰다. 기자가 자기 의견을 대신 말해 줄 ‘대리인’을 찾는 셈이다. 둘째, 인터뷰이 의도와 무관하게 기자가 인터뷰이의 발언 중에서 확인이 필요한 팩트나 진술을 찾기 위한 인터뷰다. 엄밀히 말해 인터뷰라는 명분의 ‘취재’다. 셋째, 일부 편집이 있더라도 인터뷰이 주장과 의도가 그대로 전달되는 ‘인터뷰’다. 세 유형 모두 전화로는 “인터뷰를 부탁드립니다”는 말로 시작된다. 그러나 인터뷰가 인용된 보도나 방송을 보면 인터뷰보다는 대리인이 필요했거나 취재가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자료사진. ⓒ gettyimagesbank
▲ 자료사진. ⓒ gettyimagesbank

 

이런 경험이 부끄러운 이유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기자에게 수정을 요청하거나 항의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결과에 익숙해지면 관행이라 여긴다. 무엇보다 인터뷰이나 기자 모두 이렇게 암묵적으로 동의한 관행을 오랫동안 저널리즘의 일부였다고 인정해 온 걸 부정할 수 없다. 기자 또한 다르지 않다. 마감에 쫓기는 시간이나 취재원에게 접근이 어려운 상황에서 목소리를 대신 빌려 달라거나 인터뷰이의 의도와 무관한 취재임을 밝히고 대화를 나누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인터뷰’란 시민이나 시청자 다수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의미와 전혀 다르게 여겨진다.

인터뷰의 의미를 떠올린 건 최근 논란이 되었던 전 법무부장관 가족의 자산관리인 인터뷰 때문이었다. 무엇이 자산관리인의 진의였는지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논란의 원인을 달리 보면 필요한 목소리의 인용이나 취재임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사용한 인터뷰라는 요청에 있지 않은가. 단순한 용어의 문제가 아니다. 기자가 관행처럼 당연히 생각했던 취재와 보도 절차가 시민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음을 드러낸 ‘사건’이라서다. 

최근 서초동 집회의 주된 구호 중엔 검찰개혁과 더불어 언론개혁이 있었다. 검찰과 언론은 취재원과 언론인이라는 서로 다른 관계에 있지만 공통점이 있다. 두 집단 모두 오래된 절차와 형식을 내면화한 조직문화에 취약하다. 업무의 가치와 내용보다 업무를 수행하는 절차의 정당성이 더 중요한 조직문화, 외부의 어떤 변화에도 우리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내부 결속 문화, 즉 관료제 문화가 그것이다.

전 법무부 장관 관련 인터뷰로 불거진 문제에 해당 언론사는 내부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조사가 책임 소재를 따지려는 것이면 크게 기대할 게 없다. 지금 언론에 필요한 것은 관료제 문화가 돼버린 저널리즘에 대한 반성, 익숙한 모든 것들과 결별이기에. 조사위원회가 아니라 혁신위원회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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