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가짜뉴스’는 뉴스의 형식을 갖춘 명백한 허위조작 정보부터 자신과 다른 해석을 내리는 의견까지 뭉뚱그려 가리키는 자의적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가짜뉴스를 단지 의도적 거짓말이라는 내용, 또는 독자 대다수가 오인할 수 있는 뉴스보도의 형식을 갖춘 조작된 정보로 좁힐 수는 없다. 가짜뉴스의 원조인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외침은 마을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 외침이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을 속이지 못 할 때, 양치기 소년의 외침은 가짜뉴스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가짜뉴스의 규정은 그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효과에 있을지 모른다. 가짜뉴스의 유형을 구분하고 공통의 속성을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한 언론사의 몇몇 기사들은 제법 훌륭한 매뉴얼을 보여주고 있다.

혐오와 분노의 대상을 만들라

첫 번째 단계. 가짜뉴스의 시작은 공격할 대상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혐오, 차별, 분노의 대상이 되는 집단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보도를 통해 이들에게 분노하고 혐오를 쏟아낼 독자와 일부 대중을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짜뉴스는 그 피해자가 아니라 그들을 ‘빨갱이’나 ‘매국노’로 부르며 분노할 이들을 응집시킬 때 효과가 발휘된다. ‘우리편’이란 나와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이 아니라 나와 같은 ‘적’을 공유하는 이들이다.

두 번째 단계. 혐오, 차별, 분노의 대상이 될 집단을 만들 때는 다양한 계층, 집단, 조직을 쪼개고 붙여야 한다. 이 중 하나는 “쪼개어 일반화시키기”다. 이는 주로 여성, 남성, 청년, 학부모와 같이 추상적 집단의 일부를 분리시키고 이들에게 대표성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수업에서 젠더 인권교육을 수행한 교사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급진적 페미니스트’란 딱지를 붙이고, 이에 항의한 일부 학부모의 의견을 전체 의견으로 확대하면 된다. [관련기사 : 조선일보) 수업시간 ‘퀴어축제’ 보여준 여교사… 그 초등교선 “야, 너 게이냐” 유행] 이로부터 다양한 입장과 의견을 가진 여성 교사를 ‘페미니스트 여교사’로, 여기에 항의한 일부 학부모를 ‘보수적 학부모’로 만들어낸다. 물론 해당 수업을 들은 학생의 의견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조직을 하나로 붙이기”다. 한 대학병원에 입점했던 떡볶이 프랜차이즈 지점이 민주노총 소속 병원노조의 압력으로 폐점을 했다는 기사가 대표적이다. [관련기사 : 조선일보) 민노총 압박에… 국대떡볶이, 서울대치과병원 매장서 퇴출] 프랜차이즈의 대표가 유튜브 채널에서 대통령을 비판했고, 이에 반발한 민주노총이 해당 지점에 불매 운동을 벌였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다. 노동시간 개정안을 비롯하여 갈수록 약화되는 노동정책에 비판적인 민주노총은 “정부에 우호적인 노조”로, 공약조차 변경하며 친재벌 정책으로 선회 중인 정부를 “민주노총에 끌려다니는 정부”로 만들어 ‘같은 편’으로 묶은 셈이다.

▲ 가짜뉴스 이미지. 사진=ⓒ gettyimagesbank
▲ 가짜뉴스 이미지. 사진=ⓒ gettyimagesbank

 

진영으로 쪼개 놓은 사회를 증명하라

세 번째 단계.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사는 ‘좌파 정부’, ‘사회주의’와 같이 한국사회의 다양한 계층, 집단, 조직을 쪼개고 붙여서 자신들이 머리 속에 그린 가상의 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한때 한국언론의 필수과목처럼 여겨졌던 독자 개발(audience development)이란 디지털 혁신 전략은 전혀 다른 의미의 충성 독자 구축으로 나타난다. 한 보수 언론사의 위 사례들은 자사의 독자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으면서 혐오, 차별, 분노를 쏟아낼 이들을 불러 모은다. 가짜뉴스의 가장 강력한 효과는 여기에 있다. 복잡다단한 한국사회의 정치적 지형을 한 언론사가 만들어낸 진영들로 단순화하고 대립과 갈등을 격화시킨다. 정파적 언론이란 특정 정당이나 정파에 일방적인 지지를 보내고 이로부터 이익을 얻는 언론이 아니다. 도리어 한 사회를 자신들이 상상해 낸 기준으로 갈라놓고 그 대립과 갈등에서 이익을 취하는 언론이 바로 정파적 언론이다.

네 번째 단계. 가짜뉴스는 해당 언론사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가짜뉴스를 무조건 신뢰하고 적의를 품을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현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고 ‘좌파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공통의 적을 공유하기만 한다면 탄핵 당한 대통령의 복권을 외치건,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건 그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 최근 광화문 광장의 대규모 보수 집회와 같이 공통의 적을 대상으로 집결한 군중에 대해 언론사는 ‘보수’라는 하나의 단어로 호명함으로써 자신이 만들어낸 한국사회 진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도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진영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 기만하는 이 과정이야 말로 가짜뉴스의 정수다. 이러한 영향력이 증명되어야 그 언론사는 마케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광고나 앞으로 닥칠 리스크에 대한 보증으로서 기타 수익원을 확보할 수 있다. 가짜뉴스가 단지 정치적 편향의 강화에 그친다면 언론사에게는 결코 매력적인 전략이 될 수 없다.

가짜뉴스는 뉴스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와 여당에서는 가짜뉴스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책이 과연 무엇이 진짜이며 진실인지를 전파하고 계몽하려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가짜뉴스의 효과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가짜뉴스에 대한 반박은 그 자체로 가짜뉴스로 만들어 놓은 한국사회의 진영 중 하나에 자신이 속하고 있다는 또 다른 증명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가짜뉴스가 만들고 있는 혐오와 분노로 점철된 시민들에게 “여러분은 보수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일 수 없는 다양한 목소리”임을 확인시켜 줄 정치적 공간의 제공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정치적 역량이 어떤 정치세력에게도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가짜뉴스, 또는 언론개혁은 단지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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