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함께 불거졌다. 2016년 11월4일 문화예술인 7449명과 228개 단체가 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냈다.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 인사와 단체를 사찰·검열하고 지원에서 배제한 명단이 폭로된 직후다. 3년이 지난 지금, 블랙리스트를 ‘문화예술 분야를 대상으로 한 과거 정부의 일’로 한정할 수 있을까.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디스페이스에서 ‘블랙리스트 이후 블랙리스트 운동’을 주제로 시국선언 3주년 토론회를 열었다. 사법·인권·노동 등 각 분야 전문가는 현 시국이 ‘블랙리스트가 작동하는 회로를 둔 채, 지금 누르지 않으니 괜찮다는 약속으로 버티는 형국’이라 요약했다.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디스페이스에서 ‘블랙리스트 이후 블랙리스트 운동’을 주제로 시국선언 3주년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디스페이스에서 ‘블랙리스트 이후 블랙리스트 운동’을 주제로 시국선언 3주년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댄스시어터 틱’이 4일 ‘블랙리스트 이후 블랙리스트 운동’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 앞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댄스시어터 틱’이 4일 ‘블랙리스트 이후 블랙리스트 운동’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 앞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참석자들은 한 목소리로 한국사회 각 분야에 블랙리스트가 여전하다고 진단했다. 현 정부가 애초 블랙리스트를 뿌리뽑을 의향이 없다는 것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부터 정리되지 않았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지난해 5월 조사 끝에 정부에 책임규명 권고안을 내놨다. 현장에선 권고안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3달 뒤 민관 공동으로 ‘블랙리스트 재발방지 이행협치 추진단’을 꾸렸지만 현재까지 진척이 없다. 

정윤희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블랙위원회 공동운영위원장은 “추진단을 통해 개선안을 전달했지만 문체부는 추진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장기 과제는 특히 단독으로 할 수 없다며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문화예술 현장과 피해자 일상이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 9월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블랙리스트 피해자 가운데 73%가 현재 피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블랙리스트 실행계획을 세우고 집행한 송수근 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은 계원예술대학교 총장에 임명됐다. 정 위원장은 “책임자들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사회지도층에 복귀하는데 지역에선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블랙리스트 사건이 있다”고 말했다.

▲정윤희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블랙위원회 위원장. 사진=김예리 기자
▲정윤희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블랙위원회 공동운영위원장. 사진=김예리 기자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오동석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블랙리스트 작성을 헌정질서 파괴 범죄로 접근하지 않고, 단지 일반 법률만 적용해 직권남용죄로 축소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블랙리스트 문제 전반을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고, 문제를 뿌리뽑는 대안은 논의될 수 없다”고 했다.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상황실장이었던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박진 활동가는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피해집단은 물론 가해집단도 광범위했고, 때론 그 결과 시민들이 스스로 위험한 행동을 안하는 검열 리스트를 스스로 품게 됐다”며 “지난 정부 모든 부처에서 나타난 문제를 현 정부가 어떻게 다루는지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다”고 했다.

박 활동가는 “제가 참여했던 경찰청 과거사위원회의 경우 개별 사건에 대해 인권침해 내용을 조사하고 권고안을 내지만 핵심인 제도적 권고는 모두 다 막혔다”며 “정보경찰 제도와 책임자 처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고용노동부 적폐청산 과정에서도 제도개선위원회 보고서가 나왔다. 그런데 노동부 관계자가 보고서 공개를 꺼렸을 정도로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한 인식은 낮다”고도 했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사진=김예리 기자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사진=김예리 기자

사법계 블랙리스트 문제도 책임자 처벌과 제도 개선이 미진하다. 양승태 대법원 당시 인사권을 남용해 법관을 사찰하고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를 시도한 사건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대법원 자체 조사를 거쳐 법관 13명에 징계 청구했지만 이 가운데 5명이 징계 대상에서 빠졌다. 징계 수준도 견책이나 감봉, 정직 등 가벼운 수준에 그쳤다. 

최은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법률위원장은 “노동 분야의 경우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공공연한 지 오래”라고 했다. 최 위원장은 “노동계 블랙리스트는 보통 노조활동과 경력을 이유로 빈발한다. 업장에 문제를 제기하면 다시는 해당 지역이나 업종에서 취업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며 “노동의 권리를 알아도 침묵하게 하는 것이 블랙리스트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각 분야 블랙리스트 피해자의 요구를 들어야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들은 “김혜수와 봉준호, 정우성 등 유명예술인도 블랙리스트에 포함됐다. 이들은 현재 블랙리스트 영향을 받지 않지만, 알려지지 않은 문화예술인과 약자들이 블랙리스트 이후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검열과 배제의 피해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을지 묻고 복원 작업에 일하는 것이 적폐를 청산할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